꿀꿀 운세다채로운 운세, 나를 위한 이야기

EP.34 · 47 / 73

열두 집의 하늘

천문대 하늘배를 타고 열두 집의 하늘로. 흑월의 다른 이름은 검은 달 릴리스.

한글 약 2,801자 · 읽는 시간 약 7분

발밑이 흔들렸다. 연이는 눈을 떴다. 나무 갑판이었다. 갑판 너머로 별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배였다. 돛 대신 커다란 놋쇠 고리가 겹겹이 돌았다. 고리마다 별자리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연이—궁전은? 아까까지 궁전이었잖아.

윤달—궁전이 접혀서 배가 됐어요. 하늘이 바뀌면 탈것도 바뀌거든요.

모카—배라니. 나 배 못 타. 섬 출신이라고 다 배 타는 줄 알아?

연이—섬 출신은 보통 배 타지 않아?

모카—그러니까 더 억울하다는 거야. 우웁.

모카가 난간으로 뛰어갔다. 별바다에 대고 무언가를 쏟으려다, 아무것도 안 나와서 더 괴로워했다.

네오는 뱃머리에 앉아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오른손은 왼쪽 소매 안에 감춰 두었다.

연이—네오. 손 좀 보여 줘.

네오—두 발 다 잘 붙어 있어. 네가 보려는 건 손이지?

연이—아까 투명해졌잖아. 나 봤어.

네오—지금은 희다. 보고 싶으면 나중에 보여 주지.

연이—(나중. 또 나중이래. 메모해 둬야지.)

연이는 메모장을 폈다. 서한비, 끌려감, 꼭 찾기. 그 위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네오 손, 나중에 꼭 보기.

갑판 한가운데 둥근 탁자가 있었다. 유리판 아래로 원 하나가 빛났다. 원은 열두 조각으로 나뉘어 있었다.

윤달—이게 이 하늘의 명반이에요. 점성술에서는 출생 차트라고 불러요.

연이—피자 같네.

윤달—열두 조각 피자 맞아요. 조각마다 집이라고 불러요. 삶의 방 열두 개.

윤달이 장갑 낀 손가락으로 원의 왼쪽 끝을 짚었다. 거기서 빛이 가장 밝았다.

윤달—여기가 첫 번째 집의 문턱. 상승궁이에요. 태어나는 순간 동쪽 지평선에 떠오르던 별자리.

연이—그게 왜 중요해요?

윤달—처음 보는 사람이 숙녀분을 볼 때 맨 먼저 보는 얼굴이거든요. 현관 같은 거예요.

문턱 위로 별자리 하나가 떠올랐다. 귀가 뾰족하고 꼬리가 둥글게 말린 짐승의 모양. 별들이 모여 작은 고양이가 되었다.

연이—고양이네… 꼭 영냥이 같아.

윤달—상승궁 사자자리인데, 별들이 고양이 모양으로 앉았네요. 숙녀분 현관에 고양이님이 서 계세요.

네오가 외투 깃을 고쳐 세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귓바퀴만 조금 붉어졌다.

윤달—그리고 바로 옆에 금성. 사랑의 별이 현관에 딱 붙어 있어요.

네오—그 해설은 생략해도 된다.

윤달—왜요? 저는 이 대목이 제일 재밌는데.

네오—그 궁합 영업, 이제 그만하라는 뜻이야.

연이—둘이 또 싸운다.

모카—멀미 나는데 싸움 구경까지 시키지 마.

연이는 원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위쪽 꼭대기, 열 번째 집에 은빛 점이 있었다.

윤달—달이에요. 꼭대기에 떠 있어요. 마음이 사람들 눈에 잘 띈다는 자리예요.

연이—그건 좀 창피한데.

모카—맞는 말이네. 너 표정 다 보여. 화나면 볼부터 빨개져.

윤달—황소자리 달이라서, 흔들리는 걸 싫어해요. 밥 먹는 시간, 자는 자리, 늘 같은 사람.

연이—(늘 같은 사람. 그래서 바뀌는 게 무서웠나.)

윤달의 손가락이 원의 아래쪽, 동쪽 문턱 바로 위로 미끄러졌다. 열두 번째 집. 그곳만 유리 아래가 흐렸다.

윤달—여기는 열두 번째 집. 숨은 방이에요. 끝나는 것들, 남몰래 지는 짐, 그리고 갇힌 것들의 자리.

흐린 유리 속에 붉은 점 두 개가 겹쳐 있었다. 불꽃처럼 일렁였다.

윤달—화성이랑 목성이 같이 들어 있어요. 싸우는 힘하고 넓히는 힘이 숨은 방에 붙어 있어요.

연이—숨은 힘이라는 거예요?

윤달—숨은 힘이죠. 아니면 숨겨 둔 사람이거나.

그때 유리 아래에서 소리가 났다. 아주 작게. 쇠사슬이 바닥을 긁는 소리.

연이—지금 들었어요?

모카—들었어. 사슬.

연이—(서한비 씨. 거기 있어.)

회의 전에 연이는 뱃머리로 갔다. 네오가 난간에 기대 별바다를 보고 있었다. 멀리서 모카가 앓는 소리가 들렸다.

연이—현관에 큰 고양이가 서 있대. 내 차트.

네오—들었다.

연이—좋아하는 거 다 보여. 귀가 빨개졌는데?

네오—바람이 차서 그래. 얼굴 붉어진 건.

바람은 반대쪽에서 불고 있었다. 연이는 굳이 말하지 않고 네오 옆에 앉았다.

연이—네오. 나 처음 봤을 때, 너도 내 현관 봤어? 첫인상 같은 거.

네오—봤다. 우산이 뒤집힌 채로 화를 내고 있었다.

연이—최악이네.

네오—뒤집힌 우산을 끝까지 들고 있더라. 그게 처음 기억나는 모습이야.

연이가 무릎을 끌어안자 네오의 어깨가 닿았다. 따뜻했다. 오른손만 여전히 소매 안에 숨어 있었다.

연이—(발은 끝까지 안 보여 주네. 그래도 오늘은 여기까지만.)

배가 갑자기 기울었다. 놋쇠 고리들이 비명을 지르며 멈췄다. 하늘 한쪽이 지워지고 있었다.

검은 원이 별자리 사이를 지나갔다. 원이 지나간 자리마다 별빛이 사라졌다. 숟가락으로 떠먹은 자리처럼.

윤달—검은 달. 점성술사들은 빛 없는 달 자리를 릴리스라고 불러요. 이 하늘에서는 그게 흑월의 이름이에요.

연이—이름이 몇 개야, 저거.

네오—먹은 하늘 수만큼.

모카—그럼 저거 배 안 고프겠네. 하늘을 몇 개나 먹은 거야.

윤달—배가 고파서 먹는 게 아니에요. 비어 있어서 먹는 거죠. 먹어도 먹어도 안 차는 쪽.

연이—(안 차는 쪽. 바닥 없는 그릇. 그건 나라고 했는데.)

연이는 자기도 모르게 배를 손으로 눌렀다. 속이 서늘했다. 무언가가 거기서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검은 원이 출생 차트 바로 위에서 멈췄다. 유리판에 금이 갔다. 일곱 번째 집에서 별 하나가 뽑혀 올라갔다.

윤달—일곱 번째 집. 짝의 자리예요. 동반자를 먹고 있어요.

네오가 난간을 붙잡으려다 휘청였다. 오른손이 다시 투명해졌다. 이번에는 손목 위까지였다.

연이—네오!

네오—물러서라. 저것은 나를 노리는 것이다. 네가 아니라.

검은 원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낮고 다정했다. 다정해서 더 차가웠다.

흑월—그릇아. 열두 번째 집에 네 호랑이가 있다.

흑월—데리러 오너라. 오지 않으면 사슬이 하나씩 짧아진다.

연이—내 호랑이 아니거든. 근데 갈 거야.

흑월—그래. 너는 늘 그렇게 온다. 우산을 들고.

검은 원이 별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일곱 번째 집의 빈자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늘 한쪽이 그대로 비어 있었다.

배는 다시 움직였다. 느리게, 기울어진 채로. 넷은 탁자 둘레에 모였다.

윤달—작전 회의 해요. 열두 번째 집의 문은 차트 주인의 시각으로만 열려요. 태어난 시각을 분까지.

연이—여덟 시 삼십 분. 엄마가 아침 드라마 끝나자마자였대.

모카—그런 걸 왜 알아.

연이—생일마다 들었거든. 드라마 결말까지.

윤달—좋아요. 숙녀분은 들어갈 수 있어요. 고양이님도 숙녀분 차트에 앉아 계시니까 들어가고요.

모카—나는?

윤달—모카 씨는 따라 들어가면 돼요. 문은 손님을 막지 않아요. 다만.

윤달이 말을 멈췄다. 장갑 낀 오른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장갑 끝에서 검은 금이 팔꿈치 쪽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윤달—저는 안 돼요. 저는 시가 없는 승객이라서.

연이—시가 없어서 문을 못 지나간다고요?

윤달—이 하늘은 시각이 열쇠예요. 열쇠 없는 사람은 문 앞에서 지워져요. 조금씩.

탁자 위로 윤달의 그림자가 흐려졌다. 연이는 눈을 비볐다. 그래도 흐렸다.

연이—그럼 찾으면 되잖아요. 윤달 씨 시.

윤달—청토끼가 들고 튀었잖아요. 이 넓은 하늘 어디로 튀었는지.

그 순간 배 옆구리에서 경쾌한 종소리가 울렸다. 딩동. 문 열리는 가게 종소리.

구름처럼 생긴 비행선 하나가 배 옆에 바짝 붙었다. 토끼 귀 모양 돛이 펄럭였다. 옆구리에 반짝이는 광고판이 걸려 있었다.

청토끼—고객님들~ 청토끼 금융, 이번 하늘에도 지점 냈어요!

모카—저거 그 토끼잖아. 아직 망 안 했어?

청토끼—망하다니요~ 하늘이 바뀌면 이자율도 바뀐답니다. 오늘은 별빛 대출 특가!

청토끼의 목에 모래시계가 걸려 있었다. 모래는 연분홍색이었다. 동틀 무렵의 하늘색.

윤달—내 묘시.

청토끼—어머, 묘시 고객님. 아직 안 지워지셨네~ 대단하셔라.

네오—그 모래시계를 내려놓아라.

청토끼—싫은데요~ 이건 이 하늘에서 제일 비싼 물건이거든요. 시가 있어야 문이 열리니까!

청토끼가 앞발을 흔들었다. 비행선이 별구름 속으로 미끄러져 멀어졌다. 귀 모양 돛이 약 올리듯 까딱였다.

연이—쫓아가요. 지금 당장. 이번엔 안 놓쳐요.

윤달—숙녀분. 하나만 약속해 줘요. 저 토끼 잡으면, 제 시를 찾는 건 숙녀분이 하는 거예요.

연이—제가요?

윤달—저는 제가 언제 태어났는지 이제 잘 기억이 안 나거든요.

윤달은 웃으며 말했다. 웃는 얼굴의 가장자리가 별빛에 조금씩 번져 있었다. 연이는 그 얼굴을 오래 보았다. 잊지 않으려고.

윤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카가 돛줄을 잡아당겼다. 놋쇠 고리들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배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모카—멀미고 뭐고 몰라. 저 토끼 귀, 오늘 꼬치에 꿴다.

연이—모카, 배 못 탄다며!

모카—못 타. 그래서 빨리 끝내려는 거야!

별바다가 뱃전에 부딪혀 은빛 물보라가 일었다. 앞쪽 구름 사이로 토끼 귀 돛이 보였다 사라졌다.

윤달—숙녀분. 제 이야기 들을 준비 해 둬요. 시를 찾으려면 거꾸로 걸어가야 하거든요.

연이—거꾸로요?

윤달—생시 보정이라고 해요. 살면서 생긴 일을 하나씩 짚어서, 태어난 순간까지 되감는 거예요.

연이는 메모장을 다시 펼쳤다. 새 쪽 맨 위에 적었다. 윤달 씨, 태어난 시각, 거꾸로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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