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장터 끝 회랑. 무성은 금빛 깃털 하나를 모카의 귀 뒤에 꽂아 주었다. 모카는 그걸 빼지 않았다.
무성—해맞이 무대에서 봐. 이번엔 눈 뜨고 부를게.
모카—눈 뜨고 불러도 음은 틀릴 거잖아.
무성—응. 그러니까 맨 앞줄에 앉아. 제일 크게 웃으라고.
무성은 회랑 아래 구름 계단으로 내려갔다. 몇 계단 내려가다 돌아서서 크게 손을 흔들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쉬어 있었다.
연이—귀 뒤에 그거, 잘 어울려.
모카—시끄러. 바람 불어서 꽂아 둔 거야.
연이—바람 안 부는데.
모카—이따 불 거야. 미리 꽂아 둔 거야.
네오—그 말대로면 비 오기 전부터 우산 펴고 다녀야겠네.
연이—어, 네오가 농담했어. 방금 농담한 거지?
네오—그냥 본 대로 말했어.
윤달—고양이님 요즘 말이 많아지셨어요. 궁합상 좋은 징조예요.
네오—궁합 얘기는 그만.
윤달이 명반을 펼쳤다. 午의 칸이 맑아져 있었다. 대신 戌의 칸 위로 가는 빗금이 비처럼 그어져 있었다.
윤달—戌, 재백궁이에요. 재물의 방. 그런데 숙녀분 명반에서는 조금 특별해요. 신궁이 여기 있거든요.
연이—신궁?
윤달—명궁이 타고난 얼굴이라면 신궁은 몸이 머무는 방이에요. 숙녀분 몸은 재물의 방에 산다는 뜻이죠.
연이—내 몸이 지갑이라고요?
윤달—비유하자면요. 받은 걸 담아 두는 곳. 그리고 흘려보내는 곳.
연이—(담아 두는 곳. 무성이 그랬지. 재백의 방에 그릇이 있다고.)
연이는 무심코 손바닥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손금 사이로 아주 가는 빗물 자국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戌의 문으로 가는 길은 궁전 북서쪽 끝, 구름 골짜기를 건너야 했다. 골짜기에 닿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네오—이 비. 냄새가 다르다.
연이—(알아. 맑은 날 복도에서 맡던 냄새야.)
젖은 바위 위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연이가 떼어 냈다. 빗물에 번진 글씨가 반쯤 남아 있었다.
[ 장부 · 乙亥 연이 · 미수 2 ]
연이—장부 종이야. 서한비 씨 거.
몇 걸음 더 가니 또 한 장. 그다음에 또 한 장. 종이들은 길을 따라 띄엄띄엄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흘린 것처럼.
윤달—흔적을 남긴 거예요. 끌려가면서.
연이—끌려가?
윤달—종이마다 같은 줄이에요. 미수 2. 숙녀분 칸만 골라서 뜯어 놨어요.
연이—(다른 칸도 많을 텐데. 왜 하필 내 칸을.)
네오—길을 알려 주는 거다. 자기를 찾으라는 게 아니라, 이쪽으로 오지 말라는 경고일 수도 있고.
연이—둘 중 뭐든 상관없어. 이 종이 따라가.
연이는 젖은 종이를 한 장씩 주워 메모장 사이에 끼웠다. 종이는 차가웠다. 손끝에 빗물이 스몄다.
대답처럼 골짜기 아래에서 소리가 올라왔다. 쇠사슬이 바위를 긁는 소리. 무거운 것이 질질 끌리는 소리.
골짜기 아래 안개 속에 검은 것이 보였다. 커다란 짐승. 줄무늬가 있는 등. 그 목과 앞발에 검은 사슬이 감겨 있었다.
연이—…호랑이.
사슬 끝을 쥔 것은 손이었다. 수십 개의 검은 손. 손들은 호랑이를 안개 속 더 깊은 곳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호랑이의 발자국마다 물이 고였다. 그 물 위로 장부 종이가 한 장씩 떨어졌다.
연이—서한비 씨!
호랑이가 고개를 돌렸다. 붉은 눈이 안개 너머에서 연이를 찾았다. 그리고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검은 호랑이—오지 마요.
손들이 확 당겼다. 호랑이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사슬 소리만 한참 동안 메아리쳤다.
연이가 골짜기로 뛰어들려 하자 네오가 앞을 막았다. 연이는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네오는 물러서지 않았지만 손목을 억지로 잡지도 않았다.
연이—비켜! 저 사람 끌려가잖아!
네오—안개 아래가 안 보여. 너까지 떨어지면 구할 수 없어. 다른 길을 찾자.
연이—그 사람이 나 구해 줬어. 정류장에서. 복도에서. 나는 한 번도 못 갚았는데.
연이의 목소리에 불이 섞였다. 네오는 이를 악물었다. 아팠지만 피하지 않았다. 연이가 숨을 고를 때까지 앞을 지켰다.
네오—갚게 해 주겠다. 다만 길을 알고 가자. 저 손들은 戌의 방에서 나왔다.
윤달—고양이님 말이 맞아요. 그릇이 있는 방. 거기 가면 왜 끌려가는지도 알 거예요.
戌의 문 안은 넓은 전각이었다. 둥근 지붕이 뚫려 있어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바닥에 얕은 물웅덩이가 거울처럼 깔려 있었다.
전각 안쪽 단 위에 빈 옥좌가 있었다. 옥좌 위로 보랏빛 별 하나가 떠 있었다. 차갑고 맑은 빛이었다.
윤달—자미. 별들의 임금이에요. 숙녀분 명반에선 化權, 결정하는 힘을 쥐고 있어요.
옥좌 옆에는 도장을 든 것 같은 작은 별이 있었다. 그리고 전각 구석에는 안개가 뭉쳐 웅크리고 있었다. 안개는 가끔 숨을 쉬듯 부풀었다.
윤달—도장 별이 천상, 구석의 안개가 타라예요. 타라는 질질 끄는 별이고요. 일을 미루고 발목을 잡아요.
연이—(질질 끄는 별. 사슬 소리가 여기서 났구나.)
「왔구나, 乙의 아이야. 오래 기다렸다. 앉을 자리는 없지만.」
연이—별님, 아까 호랑이가 끌려갔어요.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네 발밑을.」
단 아래 물웅덩이 한가운데, 커다란 그릇이 놓여 있었다. 사람 키만 한 흙빛 그릇. 안은 어둡고 깊었다.
빗물이 그릇 안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차지 않았다. 바닥이 없는 것처럼, 떨어지는 족족 사라졌다.
「이것이 너다. 乙목의 덩굴은 남의 숨까지 담는다. 그래서 흑월은 너를 그릇이라 부른다.」
연이—담는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흑월은 몸이 없다. 하늘을 먹어도 머물 곳이 없다. 그래서 담길 곳을 찾는다. 비어 있는, 그러나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그릇.」
그릇 안의 어둠이 소용돌이쳤다. 그 안에 장면들이 떠올랐다. 연이가 빵을 나눠 주는 장면. 우산을 씌워 주는 장면. 마지막 동전을 아이에게 주는 장면.
연이—(내가 준 것들이야. 근데 왜 이게 다 그릇 안으로.)
「너는 주는 아이다. 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흑월은 그것을 이용했다. 너에게서 운을 거두게 했다. 주면서 비고, 거둬져서 비도록.」
연이—거두게 했다고요. 누구한테.
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릇 바닥에 장부 한 장이 떠올랐다. 거둬들인 운이 빼곡히 적힌 장부. 끝에 낯익은 서명이 있었다. 비를 닮은 이름.
윤달—호랑이가 숙녀분 운을 거둔 건 흑월 명령이었어요. 그게 숙녀분을 비우는 일이었고요. 본인은 막으려고 그런 거였을 텐데.
연이—막으려고? 그 사람이 내 운을 다 가져가서 나 올봄 내내 맨날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윤달—네. 그건 사실이에요. 피해는 피해예요. 다만 누가 그 장부를 쥐여 줬는지도 사실이고요.
연이—(넘어진 날마다. 우산이 뒤집히던 날마다. 그 사람은 장부에 한 줄씩 적고 있었던 거야.)
연이—그럼 서한비 씨는 처음부터.
「속은 것이다. 너를 지키려고 장부를 들었고, 그 장부가 너를 비웠다. 그 아이는 지금도 그 셈을 모른다.」
빗소리만 들렸다. 연이는 그릇 가장자리에 손을 얹었다. 차가웠다. 그리고 텅 비어 있었다.
연이—그럼 나는 어떡해요. 주지 말아야 해요? 이제부터 아무한테도?
「아니다. 그릇은 비어야 담긴다. 비는 것은 죄가 아니다.」
「무엇을 담을지는 그릇이 정한다. 흑월이 아니라.」
옥좌 위의 보랏빛 별이 한 번 깜빡였다. 그 빛이 그릇 안으로 한 줄기 떨어졌다. 그릇 바닥에 작은 글자 하나가 새겨졌다. 權.
연이—(결정하는 힘. 내 명반의 化權. 담을지 말지는 내가 정한다.)
네오—들었나. 네가 정하는 거다.
연이—응. 들었어.
연이—(서한비 씨를 용서할지도, 내가 정하는 거겠지. 근데 그건 아직 못 정하겠어.)
연이—별님. 그 사람, 데려와야 해요. 따질 게 산더미거든요. 용서할지 말지는 그다음에 정할래요.
「그것도 그릇이 정할 일이다.」
윤달—숙녀분, 방금 엄청 어른 같았어요.
연이—원래 어른이거든요. 스물셋.
그때 윤달이 손에 든 명반에서 소리가 났다. 유리에 금이 가는 소리. 여덟 칸 글자판이 저절로 떠올랐다.
[ 年 壬午 · 月 丙午 · 日 乙亥 · 時 庚辰 ]
時의 칸, 庚 글자가 깜빡였다. 켜졌다 꺼졌다. 숨이 고르지 않은 사람처럼.
윤달—庚이. 고양이님 칸이 흔들려요.
「빌린 자리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 고양이는 네 명반에 빌려 앉아 있다. 갚을 날이 다가온다.」
연이—갚는다니. 네오. 무슨 소리야.
네오가 대답하려는 순간 오른손이 투명해졌다. 검은 얼룩도 함께 흐려졌다. 빗물이 손바닥을 그대로 통과했다.
네오—…아직은 괜찮다.
연이—괜찮다는 말 금지라고 했지! 벌금이야, 꼬치 열 개!
네오—내겠다. 나중에.
연이—나중 말고 지금 말해. 뭘 빌렸고, 언제까지 갚아야 하는지.
네오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손에 천천히 색이 돌아왔다. 연이는 그 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전각 밖으로 나오자 하늘이 움직이고 있었다. 열두 개의 문이 천천히 돌았다. 궁전 전체가 거대한 시계처럼.
모카—야, 하늘이 돈다. 나 멀미 나.
윤달—궁이 집으로 바뀌고 있어요. 열두 궁에서 열두 집으로. 다음 하늘이 열리는 거예요.
「乙의 아이야. 다음 하늘은 별의 집이 열두 개다. 거기서는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연이—그것?
하늘 한가운데, 별과 별 사이 빈 곳에 검은 원이 떠올랐다. 달 모양이었다. 그러나 빛이 없었다. 빛을 빨아들이는 달이었다.
「검은 달. 그곳에서는 흑월을 그렇게 부른다.」
검은 달 아래로 사슬 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엔 훨씬 멀리서. 연이는 메모장을 꺼내 마지막 줄에 적었다. 서한비, 끌려감, 꼭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