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끝은 사원 아래의 둥근 방이었다. 천장이 없는데도 비가 내렸다. 빗물은 바닥에 닿기 전에 붉은 실을 타고 흘렀다.
방 한가운데 검은 호랑이가 앉아 있었다. 목의 금장 고리에서 사슬이 바닥 틈으로 이어졌다. 그 틈 아래로 비늘 덮인 꼬리가 느리게 꿈틀거렸다.
연이—찾았다.
모카—와. 진짜 있네. 근데 생각보다 훨씬 크다.
윤달—크기는 우리 쪽이 넷이에요. 숫자로 이기면 돼요.
네오—숫자로 이긴 적이 있나.
윤달—오늘이 첫 경기예요.
검은 호랑이—찾아오셨네요. 실을 그렇게 꼭 쥐고. 따지러 온 사람치고는요.
연이—따지러 온 거 맞아요. 목록도 있어요.
연이는 메모장을 펼쳤다. 호랑이의 금빛 눈이 메모장으로 향했다. 그 눈이 아주 잠깐, 배고픈 짐승처럼 가늘어졌다.
연이—하나. 북 치던 아이의 박수. 둘. 식상의 섬 사람들 목소리. 셋. 옆집에서 내 양말 개수 센 거.
검은 호랑이—마지막 건 좀 억울한데요.
연이—억울한 건 나야! 두 짝이 안 맞는다고 벽에 대고 말했잖아!
모카—연이야. 지금 그게 중요하냐.
연이—다 중요해. 하나씩 따질 거야.
호랑이는 웃지 않았다. 대신 사슬이 한 번 당겨졌다. 호랑이의 목이 아래로 꺾였다. 숨을 고르는 소리가 거칠었다.
검은 호랑이—넷. 제가 연이 님을 구한 것도 적어 두셨겠죠. 휴대폰에서 손이 나오던 날.
연이—…적었어요. 그것도 따질 거예요.
검은 호랑이—구해 준 걸 따진다고요?
연이—왜 구했는지. 그걸 안 들으면 나머지를 못 따지거든요.
윤달이 연이 뒤에서 낮게 속삭였다. 장갑 낀 손을 살짝 들어 바닥의 사슬을 가리켰다.
윤달—숙녀분. 저 사슬, 꼬리에 직접 묶여 있어요. 억지로 끊으면 꼬리가 깨어나요.
윤달—꼬리는 지나간 걸 먹어요. 깨어나면 저분 기억부터 먹을 거예요.
모카—그럼 어떡해. 그냥 두고 얘기만 해?
네오—얘기가 먼저다. 저 짐승은 지금 명령을 받은 상태다. 눈을 봐라.
호랑이의 금빛 눈 안에 검은 점 하나가 떠 있었다. 작은 일식처럼. 점이 커질 때마다 호랑이의 발톱이 바닥을 긁었다.
검은 호랑이—시간이 없어요. 저는 지금 연이 님을 비우라는 말을 듣고 있어요. 머릿속에서. 계속.
연이—비우라니. 뭘 비워.
검은 호랑이—끝까지 쥐고 있는 것부터요.
검은 앞발이 번개처럼 뻗었다. 연이의 손에서 메모장이 사라졌다. 호랑이가 그것을 앞발 아래 눌렀다.
모카—야! 그거 돌려줘!
윤달—모카 씨, 잠깐. 저 눈, 지금 싸우고 있어요.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호랑이는 메모장을 찢지 않았다. 발톱도 세우지 않았다. 그저 앞발로 페이지를 넘겼다. 한 장, 또 한 장.
페이지마다 연이의 서툰 글씨가 빼곡했다. 남의 이름과 남의 사정. 꼬치 개수, 생일, 닭 울기 전, 왼팔.
호랑이의 앞발이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굵게 두 번 눌러 쓴 줄이었다. 서한비, 끌려감, 꼭 찾기.
검은 호랑이—이건, 언제 쓴 거예요.
연이—별의 궁전에서. 끌려가는 소리 듣고 바로.
호랑이가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거기에도 있었다. 북 아이 이름, 호랑이 망토 안, 그리고 작은 물음표.
검은 호랑이—이것도 적어 두셨네요. 제가 숨긴 걸.
연이—숨긴 게 아니라 맡아 둔 거라고 생각했어요. 물음표는 그래서 붙였어요. 아직 모르니까.
호랑이의 숨이 멎었다. 눈 안의 검은 점이 흔들렸다. 커지려다가 멈췄다.
검은 호랑이—이름은 빚이라고 했죠. 불러 주면 빚진다고. 그런데 왜 제 이름을 이렇게 크게 적었어요.
연이—빚지려고요.
검은 호랑이—네?
연이—빚진 사람은 꼭 다시 만나야 하잖아요. 갚으러든 받으러든. 그러니까 일부러 빚졌어요. 서한비 씨한테.
호랑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장부를 수천 장 써 온 짐승이었다. 그런데 이런 셈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모카—연이 저거, 사채업자보다 무서운 논리야.
윤달—저는 오늘부터 숙녀분한테 돈 안 빌릴래요.
네오만 웃지 않았다. 그는 호랑이를 오래 보았다. 적을 경계하는 눈빛보다 같은 날 비를 맞았던 사람을 알아보는 눈빛에 가까웠다.
네오—기억해 내라. 그 봄의 마지막 장면을. 네가 본 그대로 말고, 그 자리에 실제로 있던 것을.
검은 호랑이—당신이 뭘 알아요. 그 봄에, 당신은 너무 늦게 왔잖아요.
네오—그래. 늦었다. 그래서 이번엔 일찍 왔다.
연이—(늦게 왔다고? 네오가? 그 봄에?)
검은 호랑이—하나만 물을게요. 그것만 대답해 주시면, 이거 돌려드릴게요.
연이—물어봐요.
검은 호랑이—비 오는 날, 우산이 하나뿐이면 어떻게 해요.
연이는 생각하지 않았다. 고민할 질문이 아니었으니까.
연이—반반. 당연하지.
호랑이의 앞발이 떨렸다. 메모장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금빛 눈에서 무언가 뚝 떨어졌다. 빗물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검은 호랑이—반반. 그 말을, 왜 당신이 해요.
연이 손목의 붉은 실이 갑자기 환하게 빛났다. 실의 다른 쪽 끝은 호랑이의 오른 앞발, 고리 자국 위에 감겨 있었다.
빛 속에 장면이 떠올랐다. 버스 정류장. 우산 하나. 젤리 봉지. 두 아이의 젖은 운동화. 연이도 그 장면을 보았다.
연이—이거, 열두 번째 집에서 본 거야. 정류장.
검은 호랑이—연이 님도 보여요?
연이—(내 기억은 아닌데. 그런데 왜 우산 손잡이 감촉을 알지. 왜 젤리가 포도 맛인 걸 알지.)
윤달—다른 생의 실이에요. 두 분, 그 생에서 만났어요.
모카—그 생에서 뭐 했는데. 싸웠어?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장면이 끝까지 흐르지 않고 중간에서 멈췄다. 우산을 든 아이가 돌아서는 데서. 그다음이 검게 지워져 있었다.
그때 연이는 자기 손목에서 네오 쪽으로 이어지는 실을 보았다. 아까보다 가늘었다. 이제 한 올뿐이었다.
연이—네오. 실이.
네오—나는 괜찮아. 지금은 저쪽부터 봐.
네오의 오른팔은 어깨까지 비어 있었다. 그가 몸을 돌려 감추려 했지만 붉은 빗물이 어깨를 그대로 지나갔다.
연이—지금이 아니면 언제 봐! 계속 나중이라고만 하잖아!
네오—연이야. 지금 저 짐승이 처음으로 명령을 거스르고 있어. 그걸 봐. 내 발은 도망가지 않아.
연이—…도망가잖아. 조금씩. 다 보이게.
하늘이 열렸다. 천장 없는 방 위로 거대한 머리가 떠올랐다. 몸이 없는 머리였다. 목 아래가 깨끗하게 잘려 있었다.
흑월—머리는 배가 고프다. 꼬리는 기억이 많다. 둘 다 너 때문에 굶었다, 그릇아.
머리가 입을 벌렸다. 하늘의 달 하나가 그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숫양의 두 번째 집, 바라니의 달이었다.
연이—아… 배가.
연이는 무릎을 꿇었다. 배 안쪽이 텅 비었다. 무언가를 품고 있던 자리가 한꺼번에 꺼진 느낌이었다.
모카—연이야! 정신 차려!
흑월—호랑이. 지금이다. 비워라. 그 아이의 마지막 하나까지.
검은 호랑이—싫어요.
짧은 말이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빗소리마저 멈춘 것 같았다.
흑월—다시 말해 보아라.
검은 호랑이—싫다고 했어요. 그 애가 비워질수록 당신이 배불러져요. 저는 당신 밥을 차리려고 이 목줄을 찬 게 아니에요.
흑월—그럼 무엇을 위해 찼느냐. 기억나느냐.
검은 호랑이—그건, 그 애를 막으려고. 괴물이 되기 전에.
흑월—그래. 그 아이가 괴물이 되기 전에. 그런데 지금 그 아이는 무엇이냐.
호랑이는 연이를 보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배를 움켜쥔 스물셋의 여자. 손목에 실을 감고, 메모장을 놓친 손으로 실을 놓지 않는 사람.
검은 호랑이—…괴물로는 안 보여요. 하나도.
흑월—눈이 흐려졌구나. 비 때문에.
검은 호랑이—아뇨. 이제야 맑아졌어요.
바닥이 흔들렸다. 틈 아래의 꼬리가 깨어났다. 사슬이 미친 듯이 당겨졌다. 호랑이의 몸이 틈 쪽으로 끌려갔다.
흑월—꼬리야. 저 아이의 지나간 봄을 먹어라. 기억이 없으면 거역할 이유도 없다.
윤달—지금이에요. 고양이님, 막지 마세요.
윤달이 장갑을 벗었다. 손바닥 구멍이 사슬 쪽으로 향했다. 쇠사슬의 검은 기운이 구멍으로 빨려 들었다. 사슬이 조금 느슨해졌다.
모카—나도 거들게! 불이라도 붙이면 꼬리가 놀라겠지!
모카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냈다. 빗속이라 불이 붙지 않았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째에야 작은 불꽃이 피었다.
모카는 그 불꽃을 사슬 고리에 갖다 댔다. 쇠가 벌겋게 달았다. 꼬리가 움찔하며 잠깐 힘을 풀었다.
모카—봤지? 요리사는 비 와도 불 피워.
윤달—모카 씨, 방금 진짜 멋있었어요. 궁합 한번 볼까요.
모카—지금 그 얘기가 나와?!
네오—연이야, 실을 잡아. 저 짐승 쪽 실이야.
연이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손을 뻗었다. 손목의 붉은 실을 두 손으로 감아쥐었다. 실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연이—안 놔. 따질 게 아직 산더미야.
검은 호랑이—놓으세요. 꼬리가 당신까지 먹어요.
연이—그럼 같이 먹히지 뭐. 반반이라며. 네가 한 말이야.
호랑이의 몸이 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금빛 눈이 연이를 보았다. 그 눈에서 검은 점이 사라져 있었다.
실은 끊기지 않았다. 팽팽하게 틈 아래로 이어졌다. 그리고 실을 타고 무언가가 거꾸로 흘러 올라왔다. 낡은 빗소리. 오래된 봄 냄새.
연이—(이건 내 기억이 아니야. 저 사람 거야. 그런데 내 이름이 들려.)
네오—연이야. 그 실은 첫 번째 봄으로 이어져.
연이—그럼 따라가. 다 같이. 거기서 하나씩 전부 따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