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배 갑판에 새벽빛이 번졌다. 별구름 아래로 옅은 금빛 길이 하나 열려 있었다. 아까까지 없던 길이었다.
연이—저거 길이에요? 하늘에 길이 났어요.
윤달—시를 되찾은 사람한테만 보이는 길이에요. 집으로 가는.
모카—그럼 너, 가는 거야?
윤달은 대답 대신 장갑 낀 손을 들어 보였다. 장갑 한가운데가 안쪽으로 오목하게 꺼져 있었다.
윤달—가면 이 손도 같이 가요. 그 동네 사람들은 저를 계속 잊고요. 엄마가 아들을 세 번째로 처음 보는 집이죠.
연이—그럼 안 가는 거예요?
윤달—그건 아침 먹고 정할래요. 사람은 배가 고프면 비싼 결정을 해요.
모카—그건 맞는 말이네. 요리사로서 인정.
모카가 갑판 한쪽에 작은 화로를 피웠다. 별구름에서 건진 이슬로 죽을 끓였다. 냄새가 소박하고 따뜻했다.
연이—꿀꿀. 아니, 냄새 좋다.
모카—지금 꿀꿀이라고 했지.
연이—안 했어.
네오—했다. 기록해 두었다.
윤달—그 기록, 저도 한 부 받을 수 있을까요. 협박용으로.
연이—둘이 언제 이렇게 친해졌어!
윤달은 웃으며 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자기 명식이었다. 시 칸 하나가 오래 비어 있던 자리에 새 글자가 반듯하게 들어가 있었다.
윤달—여덟 글자가 다 찬 걸 보니까 이상해요. 남의 옷을 입은 것 같기도 하고, 드디어 맞는 옷 같기도 하고.
모카—그래서, 뭐라고 나왔는데. 너 팔자.
윤달—말년에 여자 복이 터진대요. 숙녀분, 모카 씨, 혹시 생일이.
모카—죽 엎는다.
윤달—농담이에요. 사실은 이렇게 나왔어요. 남의 길을 밝히다가 자기 길을 늦게 찾는 사람.
연이—그거 지금 딱 맞네요.
윤달—그쵸. 점술가가 자기 점은 제일 못 본다는 말, 이제 믿어요.
네오—남의 생년월일은 잘도 묻더니.
윤달—그건 영업이고요. 이건 진료예요. 진료비는 안 받아요.
넷은 화로 둘레에 앉았다. 윤달이 죽 그릇을 두 손으로 감쌌다. 연이는 그 손을 보다가 메모장을 꺼냈다.
연이—윤달 씨. 그 이름, 진짜 이름 아니죠.
윤달—들켰네요. 언제부터 알았어요?
연이—계약서 제7조. 본인 입으로 시각을 말하랬는데 이름은 안 물어봤잖아요. 청토끼가 이름을 이미 갖고 있었던 거예요.
윤달—숙녀분은 회계 감사를 했어야 해요.
네오—윤달은 달력 사이에 한 달을 더 넣는 거야. 원래 열두 달에는 없는 자리지.
윤달—맞아요. 있는데 없는 달. 제사도 안 지내고 생일도 안 쳐 주는 달.
윤달—잊히는 사람한테 딱이라 제가 지었어요. 작명 실력도 진짜죠.
웃음 끝에 짧은 정적이 왔다. 화로의 숯이 탁 튀었다. 연이는 펜을 내려놓았다.
연이—본명, 나중에 꼭 알려 줘요. 내가 적어 둘게요.
윤달—적어 둬도 잊힐 거예요. 종이는 남는데 읽는 사람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죠. 이건 누구 이름이지.
연이—그럼 계속 읽을게요.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윤달—…숙녀분은 정말 고집이 세네요.
모카—쟤 원래 그래. 맛없는 걸 맛없다고 끝까지 말하는 애야.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금빛 길 위로 검은 손 셋이 기어올랐다. 손가락마다 사슬이 감겨 있었다.
흑월—집으로 가는 길은 내 손바닥 위에 있다. 걸어 보아라.
모카—저 길 막으려고 온 거야? 치사하게!
윤달—아뇨, 길 막으러 온 거 아니에요. 저 보러 온 거예요. 제가 갈지 안 갈지.
윤달이 일어섰다. 장갑을 벗었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손바닥의 구멍이 검은 소용돌이를 뿜었다.
검은 손 셋이 구멍 쪽으로 끌려 왔다. 손톱이 갑판을 긁었다. 하나, 둘, 셋. 차례로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흑월—구멍이 넓어졌다. 내 것을 먹을수록 너는 나를 닮는다.
윤달—그럼 많이 먹어 둘게요. 당신 배고프게.
윤달은 무릎을 꿇었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구멍 가장자리가 손목 쪽으로 손가락 하나만큼 번져 있었다.
연이—왜 또 썼어요! 커진다면서!
윤달—결정했어요, 숙녀분. 저 안 가요.
윤달—이 구멍, 흑월이 죽어야 닫혀요. 그럼 흑월한테 가는 사람 옆에 있는 게 제일 빠른 길이죠.
연이—그건 우리 때문에 남는 거잖아요.
윤달—아뇨, 저 때문이에요. 이렇게 말하면 덜 미안하죠?
연이와 모카가 선실에서 잠들자 네오는 윤달을 뱃머리로 불렀다. 이번에는 투명해진 손을 감추지 않았다.
네오—부탁 하나만 할게.
윤달—고양이님이 저한테요?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요.
네오—내가 없어지면, 그 애 옆에 있어 줘라.
윤달의 웃음이 멎었다. 손목 아래가 비어 있었다. 별빛이 네오의 손을 그냥 통과했다.
윤달—언제부터예요.
네오—열두 집의 하늘에 오고 나서. 아니, 그보다 조금 전부터.
윤달—숙녀분은 알아요?
네오—메모장에 써 놨더라. 네오 손, 나중에 꼭 보기. 그때까지 미뤄 둘 수가 없어서.
윤달—싫어요.
네오—…뭐라고 했나.
윤달—궁합이 안 맞아요. 숙녀분이랑 저. 제가 봤거든요. 고양이님 자리는 고양이님이 지키세요.
네오—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다.
윤달—농담 아니에요. 사라질 생각부터 하는 수호자는 위험해요. 그 생각이 진짜 문을 열어요.
네오는 고개를 숙였다. 망토 끝이 바람에 흔들렸다. 한참 뒤에야 말을 꺼냈다.
네오—그럼 이것만. 그 애가 날 잊으면 네가 기억해 줘. 늘 잊히던 너한테 이런 부탁까지 해서 미안해.
윤달—그건 받을게요. 잊히는 사람끼리 하는 계약이니까.
네오가 선실로 돌아간 뒤에도 윤달은 뱃머리에 남았다. 희미한 달 하나가 하늘 가장자리에 걸려 있었다. 그가 들어갈 자리를 비워 둔 것 같았다.
윤달—할머니. 저 시 찾았어요. 닭보다 먼저 울었대요, 제가.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윤달은 장갑 낀 손을 가슴에 얹었다. 손바닥 구멍이 심장 소리를 조금씩 삼키는 것 같았다.
윤달—이름은 아직이에요. 그건 끝에서 찾을게요. 그 숙녀분이 적어 준다니까.
갑판 아래 선실 창에 작은 불빛이 하나 켜져 있었다. 연이가 잠결에 메모장을 끌어안고 있었다.
아침에 하늘배는 열두 번째 집 앞에 닿았다. 구름 속에 문 하나가 떠 있었다. 문틀 둘레에 낡은 사슬이 감겨 있었다.
윤달—숙녀분, 출생 시각.
연이—2002년 7월 6일, 아침 여덟 시 삼십 분. 엄마가 아침 드라마 끝나는 걸 보고 기억했대요.
문 위의 숫자판이 철컥 돌았다. 여덟 시 삼십 분. 사슬이 풀려 바닥에 떨어졌다.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안은 끝없는 베틀 방이었다. 천장에서 내려온 실들이 바닥 아래로 내려갔다. 실마다 작은 장면이 맺혀 있었다.
모카—여긴 또 뭐야. 뜨개질 공장?
윤달—열두 번째 집은 끝과 숨은 것의 방이에요. 여기엔 이번 생 말고 다른 생들의 끝이 걸려 있어요.
연이는 가까운 실 하나에 손을 대었다. 장면이 번쩍 떠올랐다. 비 오는 정류장. 우산 하나. 젖은 운동화 두 켤레.
연이—이거, 나야?
네오—놔라. 지금 당장.
네오의 다급한 목소리에 연이는 손을 뗐다. 장면이 사라졌다. 손끝에는 비에 젖은 듯한 냉기만 남았다.
연이—(왜 네오가 저렇게 무서워하지. 저 정류장을 아는 사람처럼.)
윤달이 실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천장 가까이 붉은 별과 푸른 별이 나란히 떠 있었다. 두 별에서 내려온 실이 굵게 꼬여 있었다.
윤달—숙녀분 차트에서 열두 번째 집에 든 별 둘이에요. 싸우는 별 화성, 베푸는 별 목성.
연이—싸우는 거랑 베푸는 게 한 방에 있어요?
윤달—그래서 이 집이 어려워요. 숨은 적도 여기 있고, 숨은 도움도 여기 있어요. 누가 어느 쪽인지는 끝까지 가 봐야 알죠.
네오—끝까지 가기 전에 정하면 대개 틀린다.
모카가 슬쩍 다른 실을 건드렸다. 장면이 떠올랐다. 낯선 부엌, 김이 오르는 솥, 누군가의 웃음소리. 모카는 화들짝 손을 뺐다.
모카—아무것도 못 봤어. 진짜야. 요리 장면 같은 거 없었어.
연이—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모카—…다른 생에서도 요리했나 봐. 지겹게도.
방 깊은 곳에서 사슬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젖은 발소리도 섞여 있었다. 무언가 무거운 것이 아래로 끌려가는 소리였다.
모카—저쪽이야. 사슬 소리.
윤달—바닥을 봐요. 실들이 다 아래로 내려가죠. 열두 번째 집 밑은 다른 하늘이에요.
네오—스물일곱 달이 사는 하늘이다. 사슬이 그쪽으로 끌려간다.
연이—그럼 저 소리, 우리가 쫓던 거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바닥 틈 사이로 빗물 냄새가 올라왔다. 맑은 날의 하늘배에서는 맡을 수 없는 냄새였다.
연이는 배를 꾹 눌렀다. 안쪽이 텅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무언가를 담으려고 기다리는 그릇처럼.
흑월—따라오너라, 그릇. 네가 잃어버린 봄이 아래에 있다.
연이—내 봄은 내가 정해.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바닥의 실들이 한꺼번에 팽팽해졌다. 무언가 아래에서 그 실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모카—내려가면 돌아올 수는 있는 거야?
윤달—내려간 사람은 다 돌아왔어요. 제가 아는 한은요. 물론 제가 아는 게 별로 없죠.
네오—내가 앞에 설게. 연이는 내 뒤에 있어.
연이—아니. 옆.
네오는 잠깐 연이를 보다가 한 걸음 비켰다. 투명한 손가락 사이로 실의 빛이 새어 나왔다.
연이는 메모장에 짧게 적었다. 열두 번째 집, 아래, 사슬, 비 냄새. 그리고 줄을 그어 하나를 더 적었다. 같이 내려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