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오자 도서관은 언제 젖었냐는 듯 조용해졌다. 둥근 천장 아래 열람 책상마다 말린 책들이 줄지어 펼쳐져 있었다.
모카—백열두 권째. 돼지, 내가 지금 불로 뭘 하고 있는지 알아? 책 말리기야. 요리사가.
연이—고생했어. 별 다섯 개. 다림질 서비스 추가.
모카—별 말고 밥으로 줘. 별은 못 먹어.
모카가 불씨를 굴릴 때마다 젖은 책장이 사르륵 펴졌다. 책에서 따뜻한 빵 냄새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윤달—좋은 냄새네요. 누군가의 생일 아침이 적힌 책인가 봐요.
연이—책 냄새로 그런 것도 알아요?
윤달—아뇨. 그냥 말해 봤어요. 그럴듯하죠.
모카—봐. 사기꾼은 아침부터 사기 친다.
윤달—수달 씨는 아침부터 기억해 주시네요. 고마워요.
모카—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화를 못 내겠잖아.
연이의 손목에서 아기 용이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배가 동그랗게 부풀어 있었고, 하품할 때마다 작은 물방울이 튀었다.
연이—얘 봐. 어제 마신 홍수 아직 소화 중이야.
모카—용이 물 먹고 배탈 나면 그거 무슨 날씨냐. 장마냐.
윤달—창고가 덜 찼다는 건 좋은 소식이에요. 다음 홍수에도 마셔 줄 수 있다는 뜻이니까.
연이—들었지? 너는 우리 팀 공식 정수기야.
아기 용은 그 말이 마음에 드는지 꼬리를 연이의 앞발에 한 번 감고 다시 잠들었다.
연이는 책상 끝에 앉아 앞발을 펼쳤다. 여덟 칸 글자판이 떠올랐다. 일곱 칸이 찼고, 그중 한 칸은 검게 얼어 있었다.
[ 年 壬午 · 月 丙午 · 日 乙亥 · 時 □辰 ] 7/8
연이—(이제 하나 남았어. 근데 이 빈칸은 어디서 찾아야 하지.)
연이—윤달, 이 마지막 칸이요. 시주의 첫 글자. 이건 무슨 자리예요?
윤달—숙녀분 일간이 乙목이니까, 이 자리에 올 수 있는 건 정해져 있어요. 庚금. 관성 자리예요.
연이—관성. 식상, 재성, 인성 다음 그거요?
윤달—네. 나를 다스리고 지켜 주는 기운이요. 규칙, 책임, 이름표 같은 거.
연이—근데 이상해요. 다른 칸은 다 섬에서 찾았잖아요. 관성의 섬은 없었어요.
윤달—관성 없는 명식은 없어요. 안 보이면 숨어 있는 거예요.
연이는 첫날을 떠올렸다. 강 위의 안개, 그리고 그 너머에 떠오르던 빛들.
연이—(그때 영냥이가 그랬어. 네 사주 글자는 네 개의 섬에 흩어져 있다고.)
푸른빛, 흔들리는 불빛, 황금빛, 오래된 책장 같은 빛. 그때 본 빛은 분명히 네 개였다.
연이—섬은 네 개였어. 비겁, 식상, 재성, 인성. 근데 십성은 다섯 개잖아요.
윤달—숙녀분, 공부 많이 하셨네요. 제 궁합 부스에서 알바하실래요?
연이—지금 그 얘기 아니잖아요.
모카—다섯 번째 빛은 어디 갔는데. 누가 주머니에 넣었냐.
윤달—庚금은 칼이고 쇠예요. 단단하고, 차갑고, 곧아요. 乙목한테는 제일 어려운 상대죠.
연이—어려운 상대가 내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요?
윤달—어려운 상대가 짝이 되면 제일 단단해져요. 乙과 庚은 서로 끌어당기는 사이거든요.
연이—(차갑고 곧은 쇠. 왜 자꾸 누가 떠오르지.)
그때 열람실 문이 열렸다. 영냥이가 들어왔다. 털은 반쯤 말라 있었고, 왼발을 디딜 때마다 아주 작게 망설였다.
연이—영냥아, 마침 잘 왔다. 처음에 네가 섬이 네 개라고 했잖아. 다섯 번째는?
영냥이—지금은 없어.
연이—없어? 십성이 다섯 개인데?
영냥이—고객센터 영업시간 끝났다.
연이—너 그 말 할 때마다 별점 깎는다.
영냥이는 책상 반대편 끝에 앉았다. 평소라면 연이 옆에 앉았을 자리였다. 연이는 그 빈자리를 한 번 보았다.
연이—(어제부터 계속 이래. 내가 다가가면 한 발 물러나.)
윤달—고양이님, 혹시 생일이 언제세요?
영냥이—왜 묻지.
윤달—습관이에요. 만나는 분마다 물어봐요. 특히 숙녀분 옆에 계속 계시는 분은 더요.
영냥이—모른다.
윤달—모르신다고요. 그것도 재밌네요.
모카—사기꾼 너 지금 고양이 떠보는 거지. 나도 다 보인다.
연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글자판을 앞발에 띄운 채 천천히 책상 사이를 걸었다.
연이—실험 하나만 할게. 다들 가만히 있어.
모카—또 뭔데. 돼지 실험은 보통 내가 다치던데.
연이가 모카 앞으로 갔다. 빈칸은 조용했다. 윤달 앞으로 갔다. 빈칸이 아주 조금 떨렸다가 다시 멎었다.
윤달—저도 시가 비어 있어서요. 서로 빈 데끼리 인사만 한 거예요.
연이는 마지막으로 영냥이 쪽으로 걸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빈칸이 점점 밝아졌다.
영냥이 바로 앞에서 빈칸이 하얗게 타올랐다. 차가운 쇠에 햇빛이 닿는 것 같은 빛이었다.
연이—어제도 이랬어. 오늘도 이래. 이것도 기분 탓이야?
영냥이—빛은 원래 밝은 쪽으로 간다. 내 털이 하얘서 그렇다.
연이—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은 처음 들어 봐.
영냥이—연이야. 뒤로 물러서.
연이—왜? 내가 가까이 가면 뭐가 문제인데.
영냥이는 대답 대신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빈칸의 빛이 확 줄었다. 그가 연이에게서 멀어진 만큼이었다.
영냥이—별일 아니야. 오늘 좀 피곤해서 그래.
영냥이는 열람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모카—야, 고양이 쟤 요즘 왜 저래. 원래도 재수 없었는데 요즘은 재수 없는 게 슬퍼 보여.
연이—몰라. 물어보면 맨날 나중이래.
윤달은 영냥이가 나간 문을 오래 보았다. 장갑 낀 손가락이 책상 위를 두 번 두드렸다.
윤달—숙녀분. 여자 명식에서 관성은 뜻이 하나 더 있어요.
연이—뭔데요?
윤달—아, 이건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지금 말하면 숙녀분이 책상에 머리 박으실 것 같아서.
연이—그러니까 더 궁금하잖아요!
모카—나도 궁금해. 말해. 안 말하면 장갑 태운다.
윤달—그럼 더더욱 비밀이에요.
오후 내내 연이는 다섯 번째 빛을 찾아 도서관을 돌아다녔다. 모카가 투덜거리며 뒤를 따랐다.
연이—도서관이잖아. 모르는 건 찾아보면 돼. 목록 데스크 가 보자.
모카—첫날 그 수다쟁이 카드함? 그거 나한테 조용히 하라고 한 놈이야.
목록 데스크의 서랍들이 둘을 보자마자 덜컥덜컥 열렸다. 카드 한 장이 날아와 연이의 코앞에 멈췄다.
[ 검색어를 말씀해 주세요 · 대출 한도 0/1 ]
연이—꽃돼지. 관성. 다섯 번째 빛.
카드 위의 글자가 잉크처럼 번졌다가 다시 모였다. 이번에는 결과가 한 줄뿐이었다.
[ 검색 결과 없음 · 소장처 : 도서관 밖 · 담당자 : 고객센터 ]
연이—고객센터?
모카—고객센터가 뭔데. 여기 그런 것도 있냐?
연이—있어. 첫날부터 있었어. 불만도 걱정도 접수 안 하는 고객센터.
연이는 카드를 뒤집어 보았다. 뒷면은 비어 있었다. 아니, 아주 희미하게 앞발 자국 하나가 찍혀 있었다.
모카—이거 고양이 발이잖아. 크기 봐. 쟤 발 맨날 내 꼬치 위에 올려놔서 내가 알아.
연이—(네 개의 섬. 다섯 번째 빛은 섬이 아니라 도서관 밖에 있대. 담당자는 고객센터.)
연이—모카. 너 혹시 영냥이에 대해서 나한테 안 한 말 있어?
모카—어? 없어. 왜 나한테 물어. 나 수달이야. 수달은 비밀 같은 거 몰라.
연이—너 지금 꼬리가 엄청 빨리 흔들려.
모카—이건 털 말리는 거야! 책 말리다 젖어서!
모카는 서둘러 다른 책장 쪽으로 사라졌다. 연이는 그 뒷모습을 오래 보았다.
연이—(모카도 알아. 윤달도 아는 눈치였어. 나만 모르는 거야.)
그날 밤. 도서관 깊은 곳의 작은 방에서 다들 잠들어 있었다. 모카는 책 베개를 베고 코를 골았다.
연이—(잠이 안 와. 빈칸이 자꾸 생각나.)
연이는 몸을 뒤척이다가 방 구석을 보았다. 영냥이가 늘 웅크려 자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연이—영냥아?
대답이 없었다. 연이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았다. 모카의 코 고는 소리 사이로 자기 심장 소리가 들렸다.
빈자리에는 하얀 털 몇 가닥과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앞발 자국 모양의 서명이 찍혀 있었다.
[ 금방 온다. 걱정은 접수하지 않는다. · 고객센터 ]
연이—이게 무슨 쪽지야. 걱정을 왜 접수 안 해!
연이—(언제부터 우리 고객센터가 이렇게 말없이 문을 닫았지.)
연이는 쪽지를 들고 일어났다. 손목의 아기 용이 잠결에 눈을 떴다. 그리고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하늘은 맑았는데, 비 냄새만 났다.
연이—이 냄새, 알아.
연이—(물에 잠긴 서가에서도, 사슬 위에서도 났던 냄새. 젖은 망토 냄새.)
연이는 쪽지를 접어 앞발에 꼭 쥐었다. 그리고 소리 나지 않게 창문을 열었다.
연이는 창틀에 매달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둥근 지붕 꼭대기에 두 개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하나는 모자를 쓴 하얀 고양이였다. 반쯤 먹힌 해 아래에서도 모자의 초승달이 금빛으로 빛났다.
다른 하나는 검은 호랑이였다. 젖은 망토 끝에서 빗물이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연이—둘이 왜 같이 있어. 싸우는 거야?
손목의 아기 용이 연이의 앞발을 꽉 물었다. 가지 말라는 건지 빨리 가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연이—알았어. 조용히 갈게. 너도 숨 참아.
둘은 싸우고 있지 않았다. 조금 떨어져서, 같은 쪽을 보고 서 있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바람이 불었다. 영냥이의 눈이 금빛으로 번쩍였다. 칼날 같은 빛이 지붕을 한 번 가르고 사라졌다.
연이—(영냥아. 너 지금, 누구 편이야.)
연이가 창틀을 넘으려는 순간, 지붕 위의 두 그림자가 동시에 이쪽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