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꿀 운세다채로운 운세, 나를 위한 이야기

EP.20 · 25 / 73

이름은 빚이야

추격 끝에 연이는 망토 안에 숨은 북 아이의 이름을 본다. 네 이름은? 이름은 빚이야.

한글 약 2,766자 · 읽는 시간 약 7분

둥근 천장으로 오르는 나선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층마다 책장 사이로 빗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연이—저 위야! 젖은 발자국이 계속 위로 이어져.

영냥이—계단이 미끄럽다. 난간 쪽으로 붙어라.

연이—(영냥이 왼발, 또 감싸 쥐고 있어. 아까부터 계속.)

연이—너 발 괜찮아? 아까 물에 빠지고 나서부터 이상하게 걷는데.

영냥이—고양이는 원래 이렇게 걷는다. 위엄 있게.

연이—위엄이 절뚝거려.

그때 위쪽에서 검은 물살이 계단을 타고 굴러 내려왔다. 떠내려온 책들이 낙엽처럼 발목을 쳤다.

연이—또 물이야? 쟤는 물을 무슨 수도꼭지처럼 틀어!

물살이 한 번에 세 칸을 삼켰다. 연이의 발이 계단에서 떨어지려는 순간, 손목이 따뜻하게 꿈틀거렸다.

아기 용이 고개를 내밀고 입을 크게 벌렸다. 쏟아지던 물이 소용돌이치며 그 작은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연이—또 마셨어? 아까 배 터진다고 했잖아!

아기 용은 대답 대신 트림을 했다. 비 냄새가 났다. 연이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가 꾹 참았다.

영냥이—물을 가두는 창고다. 아직 덜 찼다는 뜻이겠지.

연이—좋아. 그럼 오늘은 무한 리필이야.

계단 몇 칸 위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물에 젖은 계단 한 구간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영냥이—끊겼다. 건너편까지 다섯 걸음은 된다.

연이—(고양이는 뛰면 되지만 난 돼지야. 돼지는 다섯 걸음 못 날아.)

연이는 무너진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젖은 책장 틈마다 연둣빛 덩굴이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연이—영냥아. 먼저 건너가. 나는 내 방식대로 갈게.

영냥이—무슨 방식.

연이—돼지식 공중그네.

연이가 앞발을 뻗자 덩굴이 책장에서 튀어나와 그 발에 감겼다. 연이는 그대로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덩굴이 활처럼 휘었다가 튕겼다. 작은 분홍 몸이 빗줄기를 가르며 건너편 계단에 굴러떨어졌다.

연이—착지 성공! 꿀악! 별 다섯 개!

영냥이—착지가 아니라 굴렀지.

연이—구른 것도 착지야. 돼지 규칙이야.

영냥이가 가볍게 뛰어 건너왔다. 착지하는 순간, 그의 왼발이 아주 잠깐 접혔다. 연이는 그것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단 끝에 작은 문이 있었다. 문틈으로 이상한 빛이 새어 나왔다. 낮도 밤도 아닌, 검게 먹힌 해의 빛이었다.

문 너머는 도서관 지붕 위였다. 하늘 한가운데에 해가 떠 있었는데, 그 해의 절반이 검게 지워져 있었다.

연이—저거 해야? 왜 반쪽이 없어.

영냥이—먹힌 거야. 섬마다 나타나던 검은 손 기억하지? 그 주인이 저쪽에 있어.

지붕 끝, 빗물받이 위에 검은 호랑이가 서 있었다. 입에 문 검은 책에서 사슬이 늘어져 바람에 흔들렸다.

검은 호랑이—끈질기네.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하라고 배우지 않았어?

연이—남의 책 들고 튄 사람한테 그런 말 듣기 싫거든.

검은 호랑이—남의 책 아니야. 그 책은 처음부터 내 장부에 있었어.

연이—그럼 보여 줘. 그 장부. 내 이름이 왜 거기 있는지.

호랑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앞발을 들었다. 빗줄기가 그 발끝으로 모여들었다.

지붕 위의 빗물이 일제히 솟구쳐 연이를 향해 쏟아졌다. 아기 용이 입을 벌렸지만, 이번에는 물이 너무 많았다.

영냥이—연이야.

영냥이가 연이 앞으로 뛰어들었다. 물살이 남색 망토를 때렸고, 작은 고양이의 몸이 한 걸음 뒤로 밀려났다.

연이—영냥아, 비켜! 너 물 맞으면 안 되잖아!

영냥이—그러니까 비키라는 거다. 네가 맞으면 안 되니까.

물살이 그친 틈에 연이가 몸을 날렸다. 덩굴 하나가 호랑이의 망토 끝을 붙잡았다.

망토가 크게 젖혀졌다. 호랑이가 몸을 틀었지만 연이는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리고 연이는 보았다.

망토 안쪽은 금실로 빽빽하게 꿰매져 있었다. 그 금빛 한가운데에 검은 실로 꿰맨 글자 몇 개가 있었다.

글자는 물에 비친 것처럼 흔들려 읽히지 않았다. 그 옆에 작은 북 모양 매듭 하나와 회색 깃털 하나가 함께 꿰매져 있었다.

연이—저 깃털. 까마귀 섬에서 내가 놓친 거야.

연이—그리고 그 북 매듭. 북 대장이지? 그 애 이름이지?

검은 호랑이—놔.

연이—대답하면 놓을게. 왜 그 애 이름을 간직해? 장부에 넘기면 끝이라며.

검은 호랑이—넘기면 끝이니까. 끝나면 그 애 손목 흉터는 영영 안 아물어.

연이—그럼, 지켜 주고 있었던 거야?

검은 호랑이—착각하지 마. 보관 중일 뿐이야. 언제든 넘길 수 있어.

연이—근데 아직 안 넘겼잖아.

호랑이의 붉은 눈이 흔들렸다. 빗물이 수염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연이—하나만 더 묻자. 네 이름은 뭐야?

검은 호랑이—이름은 빚이야.

연이—뭐?

검은 호랑이—누가 불러 주면, 그 사람한테 빚지는 거야. 나는 더는 아무한테도 빚 안 져.

연이—그럼 내가 먼저 빌려줄게. 이자 없이.

검은 호랑이—그런 말, 예전에도 들은 적 있어. 그 대가가 이 목줄이야.

해의 검은 쪽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검은 손들이 하늘에 금을 긋듯 길게 뻗어 왔다.

목소리—무엇을 지체하느냐. 책을 가져와라. 그리고 그 돼지의 남은 운도.

호랑이 목의 금장 고리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숨을 삼키며 몸을 웅크렸다.

연이—야, 너 목. 괜찮아?

검은 호랑이—비켜, 돼지. 지금 내 옆에 있으면 너까지 쓸려.

목소리—빚을 잊었느냐. 네가 나에게 무엇을 빌렸는지.

고리가 한 번 더 조여들었다. 호랑이는 비틀거리며 책을 지붕 위에 떨어뜨렸다.

책이 지붕에 부딪히는 순간, 사슬에 걸린 자물쇠가 쨍 하고 갈라졌다. 자물쇠에 새겨진 두 글자가 빛이 되어 튀어 올랐다.

영냥이—壬午. 연이야, 네 연주야.

두 글자의 빛이 연이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연이의 눈앞에 익숙한 글자판이 떠올랐다.

[ 年 壬午 · 月 丙午 · 日 乙亥 · 時 □辰 ] 7/8

연이—들어왔어! 일곱 개야. 이제 하나만 남았어!

그런데 연이는 곧 웃음을 멈췄다. 연주의 첫 글자가 이상했다.

[ 年 壬 · 결빙 ]

壬 자는 검은 얼음에 갇혀 있었다. 다른 글자들은 따뜻하게 빛나는데, 그 한 글자만 숨을 쉬지 않았다.

연이—왜 얼어 있어? 나 이거 받았는데 안 받은 것 같아.

검은 호랑이—녹이려고 하지 마.

연이—뭐?

검은 호랑이—녹으면 아파. 그 안에 든 거, 너는 아직 몰라도 돼.

호랑이가 지붕 위의 책을 다시 물었다. 자물쇠는 깨졌지만 검은 사슬은 그대로 책을 감고 있었다.

연이—기다려! 그 안에 든 게 뭔데. 너 진짜 그 봄에 있었지?

호랑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빗줄기 속으로 뛰어든 검은 몸이 그대로 비가 되어 흩어졌다.

해의 검은 쪽에서 뻗어 나온 손들도 천천히 물러났다. 마치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이.

둥근 천장 아래로 돌아오자 비가 그쳐 있었다. 젖은 책들 사이로 모카가 불씨를 굴리며 책장을 말리고 있었다.

모카—왔냐, 돼지. 표정 보니까 또 놓쳤네.

연이—놓쳤어. 근데 하나 받았어. 반만.

윤달—반만이라고요? 숙녀분, 명식 좀 보여 주시겠어요.

연이가 앞발을 내밀었다. 글자판이 떠오르자 윤달이 장갑 낀 손으로 턱을 괴었다.

윤달—壬午. 연주군요. 壬은 숙녀분에게 정인이에요. 나를 길러 주고 감싸 주는 물.

연이—정인. 엄마 같은 거예요?

윤달—비슷해요. 여름에 태어난 乙목에게 제일 필요한 게 비거든요. 그런데 그 비가 얼어 있어요.

모카—얼면 어떻게 되는데.

윤달—그래도 돌아온 건 돌아온 거예요. 얼어 있어도 숙녀분 자리에 앉아 있잖아요.

모카—그러니까 얼면 뭐가 문제냐고. 빙수 되냐.

윤달—비가 안 오죠. 나무가 목말라요. 그리고 금이 나무를 벨 때, 사이에서 받쳐 줄 물이 없어요.

윤달은 말끝을 흐리며 영냥이 쪽을 힐끗 보았다. 영냥이는 젖은 모자를 털어 고쳐 쓰며 모르는 척 시선을 피했다.

연이—그럼 녹이면 되잖아요.

윤달—녹이는 방법을 아는 분이 방금 비가 되어 사라졌죠.

모카—줄무늬 걔? 걔가 얼려 놓고 걔가 녹이는 법을 안다고? 사기꾼 너보다 더한 사기꾼이네.

윤달—저는 궁합만 속여요. 얼음은 안 다뤄요.

모카—속인다고 인정했다. 방금 다들 들었지?

윤달—수달 씨, 기억해 주셔서 고마워요. 진심으로요.

연이—걔가 그랬어요. 녹으면 아프다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모카의 불씨만 작게 탁 소리를 냈다.

연이—(내 이름이 적힌 책. 망토 속 북 대장. 이름은 빚이라는 말. 같이 쓰자던 우산.)

연이—(전부 하나로 이어질 것 같은데, 아직 실이 안 보여.)

연이는 고개를 들어 글자판을 다시 보았다. 일곱 칸이 찼다. 마지막 남은 칸은 시주의 첫 글자였다.

[ 時 □ · 비어 있음 ]

윤달—이상하네요. 이 빈칸, 처음 뵀을 때부터 비어 있었어요. 다른 칸처럼 뺏긴 흔적이 없어요.

연이—뺏긴 게 아니면 뭔데요?

윤달—원래 누가 앉을 자리인데, 그 누가 아직 안 앉은 것 같아요.

그때 빈칸이 희미하게 빛났다. 연이가 앞발을 움직이자 빛도 따라 움직였다. 빛이 가장 밝아지는 쪽에는 영냥이가 서 있었다.

연이—영냥아. 너 쪽으로 가면 빛이 세져.

영냥이—잘못 본 거야. 신경 쓰지 마.

영냥이가 한 걸음 물러섰다. 빈칸의 빛이 그만큼 약해졌다. 연이가 한 걸음 다가가자 빛이 다시 밝아졌다.

연이—기분 탓 아닌데.

그 순간, 영냥이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금빛이 번쩍 스쳤다. 칼날에 햇빛이 닿을 때 같은 빛이었다.

영냥이—연이야.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영냥이는 돌아서서 젖은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왼발을 끄는 소리가 빈 도서관에 오래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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