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꿀 운세다채로운 운세, 나를 위한 이야기

EP.16 · 21 / 73

정재의 무게

운 대출이라는 지름길을 거절하고 연이는 자기 힘으로 값을 치른다. 용 알이 깨지고 윤달이 합류한다.

한글 약 2,697자 · 읽는 시간 약 6분

유리벽 안의 시간은 꿀처럼 진했다. 연이가 눈을 한 번 깜빡이는 동안 바깥의 영냥이는 세 번이나 이름을 불렀다.

청토끼—고민은 짧게~ 6분 51초만 빌리시면 바로 나가세요. 서명은 앞발 도장으로!

토끼가 내민 계약서가 유리벽을 스르르 통과해 연이 코앞에 떠올랐다. 이자란에는 아주 작은 글씨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연이—(6분 51초. 빵 두 개 값보다 조금 많은 시간.)

윤달—숙녀분, 그 글씨 끝까지 읽어 보세요. 제 계약서도 처음엔 그 길이였어요.

청토끼—어머, 묘시 고객님은 조용히 하세요~ 실패한 선배의 조언은 할인 대상이 아니랍니다.

연이는 계약서 맨 아래 줄을 보았다. 이자 상환이 늦어지면 담보 추가. 담보: 고객님의 시(時).

연이—내 시간 칸을 채워 준다면서. 결국 그 칸을 가져가겠다는 거네.

청토끼—어머, 똑똑하셔라~ 그래도 지금 못 나가면 그냥 여기서 멈추시는 건데?

영냥이—연이야. 숨을 받쳐. 생각은 그다음이야.

연이는 배 아래로 숨을 내려보냈다. 진한 시간 속에서도 숨 하나는 제자리에 내려앉았다.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연이—(덫이 재는 게 시간이라면, 나는 모자라. 그런데 이 섬은 처음부터 이상했어.)

연이—(빵 여섯 개랑 주문서 한 장이 같은 무게였지. 이 섬은 길이가 아니라 무게로 재.)

연이—호랑이. 이 덫, 시간을 몇 시간인지로 재? 아니면 얼마나 무거운지로 재?

단 아래에서 장부를 들고 있던 호랑이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연이를 똑바로 보았다.

검은 호랑이—무게로. 이 금고에서 길이로 재는 건 토끼 장부뿐이야.

청토끼—어머, 금고지기님! 영업 비밀을 그렇게 막 흘리시면 곤란한데~

연이—그럼 이걸로 할게. 빌린 거 말고, 받은 거 말고.

연이가 앞발을 들어 올렸다. 72시간 가까운 숫자 옆에 작은 글씨 12분이 반짝였다. 연이는 그 12분만 떼어 시계판의 저울 접시에 올렸다.

[ 받은 시간 71:41:09 — 무게 0.3 ] [ 제 손으로 번 시간 00:12:00 — 무게 측정 중 ]

저울 바늘이 흔들렸다. 처음에는 조금, 다음에는 크게. 바늘이 한 바퀴를 돌아 72에서 멈췄다.

유리벽에 금이 갔다. 금은 거미줄처럼 번지더니, 종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져 반짝이는 모래로 흩어졌다.

연이—나왔다! 내 12분이 72시간이랑 같은 무게였어!

영냥이—정재다. 제 손으로 번 것은 무겁다. 이 섬에서 가장.

모카—돼지 반죽 노동이 금고를 깼어. 이 섬 별 셋으로 올려 줄게.

[ 제 손으로 번 시간 00:01:00 남음 ]

연이—어? 1분 남았네. 11분만 들었나 봐.

청토끼—이런 법이 어딨어요! 무게라니, 그건 반칙이에요!

토끼가 환기구에서 몸을 던졌다. 앞발이 노린 것은 연이가 아니라 단 위의 금빛 알이었다.

윤달이 맨손을 뻗었다. 구멍이 토끼 앞발에 쥐인 동전 덩어리를 통째로 삼켰다. 토끼가 허공에서 균형을 잃었다.

윤달—크… 오늘 외상은 진짜 갚기 힘들겠다.

휘청이는 토끼의 목에서 끈 하나가 흔들렸다. 끈 끝에 새벽빛을 머금은 작은 모래시계가 매달려 있었다.

청토끼—이거요~? 묘시 고객님 거~ 갖고 싶으면 이리 오세요!

윤달의 손이 모래시계 쪽으로 반쯤 뻗었다. 그때 금 간 천장에서 돌덩이 하나가 연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윤달은 손을 돌렸다. 구멍이 돌덩이를 삼켰다. 그 사이 토끼는 환기구로 다시 튀어 올랐다.

청토끼—최약체는 원래 도망이 빠르답니다~ 묘시는 다음에 또 보여 드릴게요!

연이—아저씨! 방금 잡을 수 있었잖아요!

윤달—잡을 수 있었죠. 근데 그럼 숙녀분 머리가 납작해졌을 거예요. 그건 계산이 안 맞아요.

검은 호랑이—그만. 금고는 여기까지야.

호랑이가 단 위로 올라섰다. 금빛 알을 앞발 아래 두고, 검은 물이 다시 바닥을 따라 번지기 시작했다.

검은 호랑이—언니 하루는 가져가. 그건 토끼 몫이었으니까. 알은 안 돼. 그건 내 장부야.

연이—그 알이 내 글자라며. 내 글자가 왜 네 장부에 있어.

검은 호랑이—비어 있던 집에 내가 먼저 들어왔으니까.

영냥이—그녀는 비어 있지 않다.

금고 전체가 흔들렸다. 위층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기계가 멈추고, 일꾼들의 비명이 회랑을 타고 내려왔다.

윤달—덫이 깨지면서 층들이 무너지고 있어요! 첫째 층 사람들이 갇혀요!

연이—(공장. 그 아이.)

연이는 알을 한 번 보았다. 호랑이를 한 번 보았다. 그리고 뒤돌아 승강기 줄을 향해 달렸다.

검은 호랑이—돼지! 알은?

연이—나중에! 위에 사람이 있어!

첫째 층 공장은 기울어 있었다. 기계 사이로 모래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루나와 모카가 일꾼들을 쪽문 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모카—늦었어, 돼지! 근데 언니 거는 지켰어. 내 품 안에 따끈하게.

판다가 커다란 등으로 기울어진 기계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 아래로 일꾼들이 한 줄로 빠져나갔다. 꼬치를 문 채로.

루나—연이 언니! 그 꼬마가 안 나와! 1분 남았다고 안 나온대!

귀 접힌 아기 토끼가 멈춘 기계 앞에 앉아 있었다. 손목 숫자는 그대로였다. 집까지 남은 빚 00:01:00.

연이—꼬마야. 나가자. 여기 무너져.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빚을 남기고 나가면 엄마 집 문이 안 열린다고, 우는 대신 기계를 붙잡았다.

연이—(내 1분. 이번엔 진짜 마지막 1분.)

연이는 제 앞발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글씨 하나가 깜빡였다. 액자에 넣으려던 12분의, 마지막 조각.

연이는 아이의 손목에 제 앞발을 댔다. 째깍. 아주 작은 소리였다.

[ 꽃돼지 → 아기 토끼 00:01:00 ] [ 집까지 남은 빚 00:00:00 ]

연이—됐다. 이제 집에 가. 꼬치는 들고 가고.

아이의 흐린 얼굴이 처음으로 또렷해졌다. 아이는 꼬치를 꼭 쥐고, 쪽문 바깥의 빛을 향해 뛰어갔다.

모카—돼지 너 방금 액자 깼다. 마음속 액자.

연이—괜찮아. 액자는 비었어도 못은 남았잖아. 또 벌면 돼.

무너진 기계 그늘에 검은 호랑이가 서 있었다. 금빛 알을 입에 문 채, 방금 전의 째깍 소리를 들은 얼굴이었다.

검은 호랑이—바보 같은 돼지. 그 1분이면 네 장부 줄 하나쯤은 갚았을 텐데.

연이—내 장부는 내가 써. 남는 1분을 어디 둘지도 내가 정해.

호랑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 사이 입에 문 알이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히 금 가는 소리를 냈다.

알이 깨졌다. 껍질 사이로 손바닥만 한 황토빛 용 한 마리가 기어 나와, 호랑이 입에서 미끄러져 연이의 앞발 위로 내려앉았다.

연이—용이야. 아기 용이야!

검은 호랑이—장부에 적힌 내 알이었는데. 왜 너한테 가.

윤달—진토는 창고예요. 창고는 쌓는 사람이 아니라 내주는 사람 편이래요. 제 스승님 말씀이에요.

아기 용이 연이의 손목 시계 문양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시계 문양이 녹아내리고, 그 자리에 글자 하나가 새겨졌다.

[ 年 □□ · 月 丙午 · 日 乙亥 · 時 □辰 ] 5/8

영냥이—辰. 다섯 번째 글자다.

호랑이는 빈 입을 다물었다. 장부를 펼쳐 한 줄을 보더니, 아무것도 적지 않고 다시 덮었다.

검은 호랑이—오늘은 미수야. 다음엔 다 거둬 간다.

검은 망토가 무너진 기계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바닥에 떨어진 알껍질 한 조각만 따뜻했다.

새벽. 섬의 해가 시계탑 바늘 끝에 걸렸다. 빵집 다락에서 모카가 품 안의 모래시계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모래시계가 루나 언니의 가슴께에 닿자 모래가 거꾸로 흘러 들어갔다. 언니의 흐린 얼굴에 색이 조금씩 돌아왔다.

루나 언니—루나…? 왜 울어. 아침 반죽 해야지.

루나—언니 바보! 다시는 하루 팔지 마! 약속해!

루나 언니—약속할게. 대신 오늘 하루는, 손님들한테 빵값을 시간 말고 이야기로 받아 볼래.

모카—그거 좋은데. 이야기는 굽기 전에 반죽 맛이 나거든.

창밖 광장에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공장에서 나온 사람들이 저마다 손목을 들여다보며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

흐렸던 얼굴들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꼬치를 문 판다가 빵집 창에 대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모카—봤지? 내 꼬치 효과야. 반은 돼지 효과고.

연이—이 섬, 이제 별 넷 줘도 되겠다.

연이—아저씨. 묘시는 놓쳤지만, 우리 같이 가요. 그 토끼 꼭 다시 만날 거예요.

윤달—숙녀분 지금 저한테 같이 가자고 하신 거죠? 그건 궁합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일게요.

영냥이—그 말이 전부라고 믿지는 마. 길을 고를 때 참고만 해.

윤달—고양이님 질투 또 시작이네. 좋아요, 길잡이로 갈게요. 네 개의 하늘 다 떠돌아 본 길잡이.

연이—그럼 이제 아저씨 말고 윤달이라고 부를게. 윤달.

윤달이 잠깐 말을 잃었다. 3년 만에 누군가 그 가명을 웃으면서 부른 모양이었다.

윤달—네. 오늘은 그 이름으로 할게요.

영냥이가 슬쩍 왼 앞발을 등 뒤로 감췄다. 윤달의 눈이 그 발을 따라갔다가, 아무 말 없이 연이에게로 돌아왔다.

그때 아기 용이 재채기를 했다. 콧구멍에서 알껍질 부스러기와 함께 낡은 종이 한 장이 튀어나왔다. 도서관 대출 카드였다.

[ 인성의 도서관 · 대출 기록 — 꽃돼지 : 「첫 번째 봄」 · 반납되지 않음 ]

연이—첫 번째 봄? 나 이런 책 빌린 적 없는데.

윤달—거긴 기억이 책이 되는 곳이에요. 빌린 적 없는 책이 대출돼 있다면, 그건 숙녀분이 잊은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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