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탑 뒷문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빵 바구니 하나가 겨우 지나갈 만한 쪽문에, 녹슨 승강기 줄이 매달려 있었다.
루나—언니가 매일 새벽 여기로 빵을 내려보냈어. 금고 경비 아저씨들 아침밥.
윤달—루나 양 덕분에 정문 일곱 겹을 건너뛰네요. 오늘의 일등 공신이에요.
루나—그럼 나 별 다섯 개야?
연이—별 다섯 개에 꽃 도장까지. 언니 깨면 자랑하자.
광장 끝에서 등불 하나가 흔들렸다. 파란 제복을 입은 토끼 순찰이 하품을 하며 지나갔다.
영냥이—숙여라. 순찰은 정각마다 돈다. 다음 정각까지 4분.
연이—(4분. 이 섬에선 4분이면 빵 하나 반이야.)
모카—순찰 토끼 귀 봐. 꼬치 냄새 맡고 실룩거려. 저것도 배고픈 거야.
순찰이 모퉁이를 돌자 넷은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건너뛰었다. 루나가 앞장서서 쪽문의 빗장을 들어 올렸다.
승강기 바구니가 삐걱이며 내려갔다. 넷과 루나는 차례로 줄에 매달려 어둠 속으로 미끄러졌다.
첫 층은 공장이었다. 수백 명이 말없이 기계를 돌리고 있었다. 기계에서는 동전 대신 째깍거리는 모래알이 쏟아졌다.
연이—이 사람들 다 경비야? 경비가 아니라 일꾼 같아.
윤달—빚진 시간을 몸으로 갚는 층이에요. 여기서 일하는 동안은 하루가 안 흘러요. 대신 집에도 못 가죠.
일꾼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흐렸다. 누구는 아이였고 누구는 노인이었다. 흐린 얼굴들 가운데 커다란 판다 하나가 졸음을 참고 있었다.
모카—다들 배고픈 얼굴이야. 맛을 잃은 얼굴.
모카—계획 바꿀게. 홀리는 게 아니라 먹일 거야. 냄새 교란은 덤.
모카가 휴대 화로에 불을 붙였다. 매운 꼬치 스무 개가 한꺼번에 지글거리자 공장 안 공기가 흔들렸다.
기계 소리가 하나씩 멈췄다. 일꾼들이 고개를 들었다. 흐린 얼굴들 사이로 침 삼키는 소리가 번졌다.
모카—줄 서. 값은 안 받아. 대신 맛있으면 맛있다고 말해. 그게 값이야.
판다가 맨 먼저 꼬치를 받았다. 한 입 베어 문 판다의 흐린 눈가가 잠깐 또렷해졌다. 맛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연이—들었어? 맛있대!
모카—당연하지. 이번엔 진짜 맛이니까.
꼬치 줄 맨 끝에 작은 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귀가 접힌 아기 토끼였다. 아이는 꼬치를 받고도 먹지 않고 손목만 들여다보았다.
연이—안 먹어? 맛있는데.
아이가 손목을 내밀었다. 작은 숫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집까지 남은 빚 00:01:00.
연이—1분? 1분 때문에 여기 있는 거야?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1분만 더 일하면 엄마한테 간다고, 꼬치 냄새 너머로 작게 말했다.
연이—(1분. 내가 번 12분이면…)
윤달—숙녀분, 지금은 안 돼요. 일곱째 칸 문값이에요. 돌아오는 길에 다시 봐요.
연이—기다려. 돌아올 때 꼭 들를게. 꼬치 식기 전에 먹고 있어.
루나—언니 빵 냄새랑 비슷해. 따뜻한 냄새.
영냥이—모카가 시선을 끄는 동안 내려간다. 둘째 층부터는 시간이 느려진다.
윤달—루나 양은 모카 씨 옆에 있어요. 아래는 어른들이 갈게요.
루나—싫어. 우리 언니 하루야. 내가 찾을 거야.
연이—그럼 셋째 층까지만 같이 가자. 거기서 기다리면 내가 언니 거 꼭 들고 올게. 약속.
둘째 층. 황금빛 회랑이 끝없이 이어졌다. 벽에 박힌 계기판 바늘들이 꿀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한 걸음을 떼자 발이 무거워졌다. 두 걸음째에는 귀에서 제 심장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연이—숨이… 위로 올라와.
영냥이—받쳐라. 어제처럼. 아래로 내려놓고.
연이는 배 아래로 숨을 내려보냈다. 귀 뒤에 꽂은 잘린 싹이 살짝 흔들렸다. 다리가 다시 움직였다.
셋째 층 문 앞에서 회랑이 덜컹 흔들렸다. 바닥 판이 뒤집히며 금속 팔들이 솟구쳤다. 경보도 없이 조용한 함정이었다.
영냥이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금빛 발톱이 금속 팔 셋을 한 번에 베었다. 잘린 팔들이 느린 시간 속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영냥이—길은 열었어. 저 문은 네가 열어야 해.
윤달—네, 네. 잠긴 건 제가 먹을게요.
윤달이 문고리에 손바닥을 댔다. 자물쇠가 통째로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윤달의 어깨가 한 번 움찔했다.
윤달—이 섬 자물쇠는 철 맛이 진하네요. 이빨이 시려요.
연이—아저씨, 방금 또 커졌죠. 손 줘 봐요.
윤달—숙녀분이 손을 잡아 주시면 덜 아플지도요.
연이—그런 말은 손 안 아플 때 해요!
셋째 층에서 루나와 헤어졌다. 루나는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였다. 다섯 시간 안에 와.
넷째, 다섯째, 여섯째 층. 내려갈수록 시간이 짙어졌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공중에 멈춰 진주처럼 걸려 있었다.
모카—나 재채기 나올 것 같아.
윤달—지금 하면 일주일이에요.
모카—알아. 그래서 참고 있잖아. 별 하나짜리 층이야, 여기.
모카의 코가 씰룩였다. 영냥이가 말없이 망토 자락으로 모카의 코를 덮었다. 재채기는 별 자수 안감 속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연이—영냥이 망토, 재채기 필터 기능도 있어? 별 하나 추가.
영냥이—공짜다. 오늘만.
일곱째 칸. 거대한 원형 금고가 열려 있었다. 벽을 따라 수천 개의 모래시계가 층층이 꽂혀 있었다.
연이—이게 다 누군가의 하루야?
윤달—하루, 한 달, 십 년. 이 섬에서 팔리고 빼앗긴 시간들이요.
모래시계마다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아이 웃음소리, 밥 짓는 소리, 누군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 팔려 온 하루의 소리였다.
모카—여기 소리 다 맛이 있어. 누구 집 저녁 냄새 같은 소리.
영냥이—너무 오래 듣진 마. 남의 하루를 따라가다 네 발이 묶일 수 있어.
[ 루나 언니 · 남은 오늘 01:12:40 ]
연이는 이름표를 하나하나 훑었다. 셋째 줄 끝에서 밀가루 묻은 손 그림이 그려진 모래시계를 찾았다.
연이—찾았다! 언니 거! 손 그림 있어!
윤달은 반대편 벽으로 달려갔다. 맨 아래 서랍 하나에 이름 대신 빈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서랍은 비어 있었다.
윤달—없네요. 묘시가 있어야 할 자리가.
연이—아저씨…
윤달—괜찮아요. 그 토끼가 들고 다니나 봐요. 먹은 걸 아까워하는 타입이거든요.
그때 금고 한가운데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아주 느리고 아주 또박또박한 소리였다.
금고 중앙의 둥근 단 위에 검은 호랑이가 앉아 있었다. 망토 위로 장부가 펼쳐져 있었고, 발밑에는 금빛 알 하나가 놓여 있었다.
검은 호랑이—늦었네, 돼지. 빵집 승강기로 올 줄은 알았지만.
연이—알았으면서 막지 않았어?
검은 호랑이—오는 손님을 막는 금고지기는 없어. 나가는 손님을 막지.
호랑이가 장부를 한 장 넘겼다. 연이는 똑똑히 보았다. 빼곡한 줄들 가운데 한 줄만 비어 있었다.
[ 꽃돼지 · 미수(未收) ]
검은 호랑이—다음 섬에서 너의 시간을 거두라는 말을 들었어. 그런데 네가 제 발로 금고까지 왔네.
연이—누가 그런 말을 했는데. 네 장부엔 사장도 적혀 있어?
검은 호랑이—질문이 많네. 빚은 남겨 두면 불어나. 그러니까 제때 거둬야지.
연이—그럼 너는? 너는 누구한테 뭘 빌렸는데.
호랑이의 꼬리가 멈췄다. 장부를 넘기던 앞발이 아주 잠깐 허공에 걸렸다.
검은 호랑이—돼지가 알 필요 없는 거.
연이—(방금, 대답을 못 했어.)
영냥이—연이한테서 손 떼.
검은 호랑이—고양이는 빠져. 너도 이미 금이 갔잖아. 왼발.
영냥이의 왼 앞발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연이는 그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연이의 눈은 호랑이 발밑의 알에 가 있었다.
연이—(저 알… 왜 이렇게 낯익지. 내 안에서 뭔가가 부르는 것 같아.)
윤달—숙녀분, 그 알이에요. 辰. 숙녀분 시지의 글자. 진토는 창고예요. 이 금고 전체가 그 알 위에 지어진 거예요.
[ 年 □□ · 月 丙午 · 日 乙亥 · 時 □辰 ? ]
연이—내 글자가 왜 금고 바닥에 깔려 있어?
알은 연이를 알아보기라도 한 듯 아주 작게 흔들렸다. 금빛 껍질 아래로 무언가 꿈틀거렸다.
검은 호랑이—시간이 비어 있는 명식은 창고가 열려 있는 집이야. 누구든 들어와서 쌓아 둘 수 있지.
모카—말 길다. 알 내놔. 언니 하루도 내놔.
호랑이가 꼬리를 한 번 휘둘렀다. 바닥의 시곗바늘을 따라 검은 물이 번져 나갔다. 물은 발목에 닿자마자 시간을 얼렸다.
영냥이—물에 닿지 마! 거기 닿으면 멈춰!
영냥이가 금선을 뽑아 물길을 갈랐다. 물이 갈라진 틈으로 모카가 몸을 날려 언니의 모래시계를 품에 안았다.
모카—챙겼어! 언니 거, 내 품에 있어!
검은 호랑이—그건 가져가. 원래 내 장부에 없는 거니까. 토끼 몫이야.
연이—그럼 저 알도 가져갈게.
검은 호랑이—그건 안 돼.
연이가 단 위로 뛰어올랐다. 앞발이 알에 닿는 순간, 단 전체가 거대한 시계판으로 바뀌었다.
종소리가 일곱 번 울렸다. 시곗바늘이 연이를 중심으로 빙글 돌더니, 연이의 몸 둘레에 투명한 유리벽이 솟았다.
연이—움직일 수가 없어! 숨이… 숨이 안 내려가!
[ 시간 덫 · 탈출 값 72:00:00 보유 71:53:09 부족 00:06:51 ]
영냥이—연이야.
검은 호랑이—미안하다는 말은 안 해. 장부에 그런 칸은 없으니까.
유리벽 바깥, 금고 천장의 환기구에서 파란 귀 두 개가 쏙 내려왔다. 청토끼가 거꾸로 매달려 손을 흔들었다.
청토끼—어머~ 딱 6분 51초 모자라시네요? 청토끼 금융이 빌려드릴까요? 이자는 아주아주 조금!
연이—(빌리면 나간다. 안 빌리면, 여기서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