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꿀 운세다채로운 운세, 나를 위한 이야기

EP.43 · 60 / 73

탑

탑이 무너지고 흑월이 네오를 삼킨다. 잊기 시작한 연이는 메모를 남긴다. 모습이 달라도 네오. 내 편.

한글 약 2,665자 · 읽는 시간 약 6분

탑은 가까이서 보니 더 높았다. 벽돌 틈마다 검은 물이 배어 나왔다. 꼭대기의 번개는 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냥 감겨 있었다.

윤달—16번, 탑. 갑자기 무너지는 카드예요. 쌓아 둔 게 한 번에.

모카—좋은 카드야, 나쁜 카드야?

윤달—거짓으로 쌓은 거면 무너지는 게 좋은 거고요. 진짜로 쌓은 거면 아프죠.

모카—그러니까 둘 다라는 거네. 점술가들은 왜 다 이래.

연이—(탑이 무너지는 게 좋은 카드일 수도 있다고. 그럼 제발 거짓말만 무너져라. 우리 말고.)

네오가 연이의 어깨에서 몸을 일으켰다. 탑 꼭대기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굳었다.

「저 위에 흑월이 있다. 머리도 꼬리도. 다 모였다.」

연이—그럼 다 같이 가. 아까 너 혼자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지? 너도 마찬가지야.

「나는 들어가면 안 된다.」

연이—그 말 들으니까 더 데려가야겠어.

서한비—제가 앞에 설게요. 그건 아직 유효하죠?

연이—반 걸음만.

탑 안은 계단뿐이었다. 바깥벽을 따라 빙빙 돌아 올라가는 계단. 난간이 없었다. 한 칸 오를 때마다 아래가 더 깊어졌다.

흑월—올라오너라. 꼭대기에 네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벽돌마다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연이는 네오를 받친 팔에 힘을 주었다. 앞에서는 서한비가 우산을 지팡이처럼 짚었다.

계단 한 칸이 무너졌다. 모카가 발을 헛디뎠다. 윤달이 장갑 낀 손으로 모카의 꼬리를 잡았다.

모카—꼬리 잡지 마! 꼬리는 신체야!

윤달—그럼 손 주세요. 생년월일시도 같이.

모카—지금?!

둘이 투닥거리는 사이 무너진 자리 위로 벽돌이 하나씩 떠올라 계단이 다시 이어졌다. 웃음이 아주 잠깐 계단에 남았다. 그 웃음이 사라질 때까지, 아래쪽 어둠은 올라오지 않았다.

벽에 그림자 두 개가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하나는 머리, 하나는 꼬리. 베다의 하늘에서 카드 속으로 숨었던 라후와 케투였다.

서한비—저 둘, 위로 올라가고 있어요. 우리보다 빨리.

윤달—합치러 가는 거예요. 일식이 완성되려면 머리랑 꼬리가 만나야 하니까.

모카—그럼 뛰어! 쟤들보다 먼저 가면 되잖아!

윤달—계단이 우리 발을 세고 있어요. 뛰면 더 길어져요. 이 탑은 서두르는 사람한테 길어지는 탑이에요.

일행은 숨을 맞춰 걸었다. 네오가 한 번 숨을 내쉬면 연이도 한 계단 올랐다. 모두 같은 속도가 되자 계단은 더 늘어나지 않았다.

흑월—빗물아. 너는 왜 거기 서 있느냐. 그 아이 앞에. 그 봄에 네 봉투를 들고 간 얼굴이다.

서한비—그 얼굴 빌려 쓴 게 누군지 이제 알아요.

흑월—알아도 그 얼굴을 보면 아프지 않으냐.

서한비—아파요. 그래서 앞에 서는 거예요. 아픈 쪽이 앞에 서야 뒤에 있는 사람이 덜 아프니까.

벽의 목소리가 잠깐 끊겼다. 연이는 서한비의 등을 보았다. 젖은 코트, 곧은 어깨. 연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등에 손바닥을 한 번 댔다가 뗐다.

꼭대기는 지붕이 없었다. 하늘 한가운데 검은 해가 걸려 있었다. 라후와 케투의 그림자가 그 검은 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해의 테두리가 붉게 타올랐다.

흑월—드디어 얼굴을 보는구나, 그릇아.

얼굴은 없었다. 둥근 어둠 가장자리로 붉은 빛만 둥글게 돌았다. 그런데 연이는 그 어둠이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연이—그릇 그릇 하지 마. 나 이름 있어. 연이야.

흑월—이름이라. 그래, 이름 이야기를 하자. 네 품의 짐승 말이다.

흑월—그는 네 명식의 마지막 칸에 앉아 있다. 시간의 칸. 庚. 그가 앉아 있는 한 그릇의 뚜껑이 닫혀 있지.

[ 年 壬午 · 月 丙午 · 日 乙亥 · 時 庚辰 ] 8/8

윤달—뚜껑이요? 그럼 고양이님이 빠지면 연이 씨는.

흑월—열린다. 그리고 나는 들어간다. 오래 기다렸다.

연이—웃기지 마. 내 사주에 내가 누구 앉힐지는 내가 정해.

흑월—네가 정했느냐. 그가 스스로 앉았지. 네 허락도 없이. 이름까지 숨기고.

연이의 입이 닫혔다. 그 말에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숨긴 건 맞았다. 다친 걸 숨기고, 이름을 숨기고, 첫 번째 봄을 숨겼다.

연이—숨긴 건 화나. 엄청 화나. 근데 그건 내가 따질 거야. 네가 따질 일이 아니야.

네오가 연이의 어깨에서 팔을 풀었다. 붙잡으려던 손이 그의 소매를 통과했다. 그는 흑월을 향해 한 걸음 나섰다.

연이—네오, 돌아와. 내 앞에 서지 마.

「이번엔 늦지 않으려고.」

네오가 남은 이름의 힘을 끌어올렸다. 투명했던 몸이 마지막으로 선명해졌다. 손끝에 금빛 날이 길게 섰다. 연이를 지킬 때 쓰던 바로 그 힘이었다.

네오—그 아이는 그릇이 아니다. 내가 앉은 자리는 뚜껑이 아니라 의자다. 같이 앉으려고 가져다 놓은.

흑월—의자든 뚜껑이든. 치우면 그만이다.

연이—네오, 그 몸 얼마나 가? 대답해.

네오—잔소리 한 번 할 시간은 돼. 연이야, 양말은 짝 맞춰 신어.

연이—지금 그게 잔소리야?! 마지막 말 같은 거 하지 마!

네오가 웃었다. 은빛 머리카락 끝에서 빛이 한 올씩 흩어졌다. 연이 발치까지 내려온 빛은 닿기 전에 사라졌다.

네오가 검은 해를 향해 뛰어올랐다. 금빛 날이 붉은 테두리를 갈랐다.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탑 꼭대기에 번개가 떨어졌다.

모카—무너진다! 계단 무너져!

서한비—연이 씨, 이쪽! 우산 잡아요!

바닥이 기울었다. 벽돌이 쏟아졌다. 연이의 발밑이 사라졌다. 서한비가 우산 손잡이를 내밀었다. 연이의 손가락이 손잡이 테이프에 닿았다가 미끄러졌다.

연이는 무너진 바닥 아래로 떨어졌다. 그때 네오가 벽을 딛고 솟아올라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두 사람의 무게가 한 팔에 실렸다.

네오—외투 잡아. 놓치지 마!

연이—잡을 수가 없어! 손이 통과해!

네오—그럼 내가 잡지.

네오가 연이를 남은 계단 쪽으로 밀어 올렸다. 윤달이 손목을 낚아챘다. 서한비가 윤달의 허리를, 모카가 서한비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네오는 아래에 남았다. 검은 손들이 그의 다리와 허리, 망토를 붙잡았다.

연이—네오! 네오야!

연이는 그 이름만 불렀다. 다른 이름은 부르지 않았다. 입술까지 올라온 세 글자 중 두 글자를, 이를 악물고 삼켰다.

네오—잘했다. 그거면 된다.

흑월—이름 없는 짐승은 맛이 없다. 그래도 금은 금이지.

검은 해가 벌어졌다. 네오가 그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마지막까지 연이를 보던 얼굴이 어둠에 가렸다. 해가 닫혔다.

조용했다. 탑은 반쯤 남아 있었다. 일행은 무너진 계단 끝에 엉켜 쓰러져 있었다. 하늘의 검은 해는 사라지고 없었다. 배가 부른 짐승처럼, 어딘가로 물러난 것이었다.

[ 年 壬午 · 月 丙午 · 日 乙亥 · 時 □辰 ] 7/8

연이가 일어나 손바닥을 폈다. 쓸린 손안에 금실 한 가닥이 걸려 있었다. 누구 옷에서 풀린 실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연이—(이 실은 어디서 묻었지. 누가 금실이 달린 옷을 입고 있었는데.)

모카—다들 괜찮아? 나 꼬리 멀쩡해? 근데 우리 몇 명이었지. 넷?

서한비—넷이요. 아니, 다섯. 흰 우산 든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서한비가 말을 멈췄다. 흰 우산. 정류장. 늦게 온 남자. 그 얼굴이 기억에서 다시 지우개질을 당하고 있었다.

서한비—아니에요. 잊으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저 그분이랑 약속한 게 있어요. 무슨 약속이었는지가.

서한비가 코트 안쪽 장부를 꺼냈다. 손바닥만 해진 장부를 급하게 넘겼다. 빈 줄, 빈 줄, 빈 줄. 비가 다 풀어 버린 장부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서한비—하필 지금. 하필 지금 다 지워졌어요. 적어 둘걸. 하나만이라도 적어 둘걸.

모카—울지 마. 너 울면 나도 울어. 누군지도 모르는데 왜 이렇게 목이 메지.

모카가 코를 훌쩍였다. 이유를 모르는 눈물이었다. 그런데 눈물은 이유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빠진 자리를.

윤달—다섯이었어요. 네오 씨가 있었어요. 예전에는 고양이였고, 지금은 사람인… 우리랑 같이 온 분요.

연이—네오. 어디서 들었는데. 왜 얼굴이 생각 안 나지?

윤달—연이 씨가 지은 이름이에요. 연이 씨가 제일 많이 불렀어요.

모카—오빠는 어떻게 기억해? 우린 다 흐릿한데.

윤달—저는 잊히는 쪽이라서요. 잊히는 게 어떤 건지 알아서, 남이 잊히는 건 꽉 붙잡게 돼요.

윤달이 장갑을 쥐었다 폈다. 그의 손바닥 공망이 아주 미세하게 따뜻했다. 무언가 금빛 한 줄기가 그 안에 걸려 있었다. 윤달은 그 이야기를 아직 하지 않았다.

연이의 가방에서 메모장이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쓴 쪽이 펼쳐졌다. 꾹꾹 눌러 쓴, 자기 글씨였다.

[ 모습이 달라도 네오. 내 편. ]

연이—이거, 내 글씨야. 내가 쓴 거야. 근데.

연이는 그 글씨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었다. 종이가 움푹 들어가 있었다. 찢어질 만큼 세게 쓴 자국이었다. 그만큼 잊고 싶지 않았던 무언가.

연이—왜 기억이 안 나. 이렇게 세게 썼는데. 내 편이라며. 내 편이 누군데.

서한비—연이 씨. 그 글씨, 믿으세요. 기억은 지워져도 손은 거짓말 못 해요.

연이—네오가… 누구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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