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글자가 떠오르기 직전이었다. 검은 것이 연이의 눈앞을 덮었다. 차가운 손바닥이 아니었다. 우산 천이었다.
서한비가 테이프 감긴 우산을 문패 앞에 펼쳐 들고 있었다. 연이 가방 옆에 꽂혀 있던 그 우산이었다. 삐뚤어진 살 하나가 문패를 정확히 가렸다.
서한비—읽지 마세요. 뒤로 세 걸음. 지금.
흑월—우산 하나로 이름을 가리겠다고. 너는 늘 그런 식이구나, 빗물아.
서한비—네. 늘 이런 식이에요. 이번엔 끝까지 이런 식으로 할 거예요.
윤달—연이 씨, 눈 감고 뒤로. 모카 씨, 불 좀.
모카가 성냥을 그었다. 작은 불이 일행 발치에 원을 그렸다. 문에서 뻗어 나오던 담쟁이가 불 앞에서 멈칫했다. 일행은 뒷걸음으로 5번 카드의 방까지 물러났다.
모카—이 불 오래 못 가! 성냥 세 개 남았어!
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담쟁이가 다시 문패를 덮었다. 흑월의 목소리도 그 안으로 잠겼다.
5번 카드의 방은 오래된 성당 같았다. 높은 창으로 별빛이 들었다. 일행은 기둥 아래에 모여 앉았다. 모카의 불이 바닥에서 작게 탔다.
윤달—6번 문은 밤에는 안 열려요. 이름이 제일 흐린 시간이라. 아침까지는 여기서 버텨요.
모카—그럼 나 먼저 잔다. 윤달 오빠 불침번. 생년월일 묻지 말고.
윤달—불침번은 물을 사람이 없어서 심심한데.
모카는 대답 대신 코를 골기 시작했다. 진짜 잠든 건지 듣기 싫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윤달은 웃으며 기둥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둘만 남겨 주려는 걸음이었다.
네오가 연이의 어깨에 기대 누워 있었다. 숨이 고르지 않았다. 연이는 그의 등에서 서늘한 빛이 스칠 때마다 손을 멈추고 다시 온기를 찾았다.
연이—(이렇게 가벼울 리가 없는데. 내가 놓치고 있는 거 아니야?)
서한비는 불 건너편에 앉아 우산을 접고 있었다. 살 하나가 계속 삐져나왔다. 접었다가, 다시 폈다가, 다시 접었다.
연이—그거, 삐뚤어진 살은 원래 그래. 내가 고친 거라.
서한비—알아요. 테이프를 세 겹 감았더라고요. 두 겹이면 충분했을 텐데.
연이—세 겹이 마음이 편해서.
서한비—연이 씨다운 셈이네요.
서한비가 우산을 내밀었다. 손잡이를 연이 쪽으로 돌려서. 받는 사람이 바로 쥘 수 있게.
서한비—돌려드릴게요. 그날 정류장에서 받은 거. 저는 복도 바닥에 버렸고요.
연이—버린 거 내가 주워 온 거야. 주운 사람이 주인이지.
서한비—그럼 더더욱 연이 씨 거죠.
연이—아니. 주운 사람이 주인이니까, 주인 마음대로 줄 수 있다고.
연이는 우산을 받지 않았다. 대신 손잡이 위에 서한비의 손을 겹쳐 놓고, 그 위를 톡톡 두드렸다. 계약서에 도장 찍듯이.
연이—가져. 빌려주는 거 아님. 갚지 마.
서한비의 다른 손이 저도 모르게 코트 안쪽으로 갔다. 장부가 있던 자리였다. 장부는 이제 손바닥만 하게 줄어 있었다. 밤마다 한 줄씩 풀려 나가는 중이었다.
서한비—습관이에요. 받으면 적으려고 해요. 손이 먼저 가요.
연이—적어 봐. 어떻게 되나 보자.
서한비가 펜을 들었다. 우산 하나, 이라고 썼다. 잉크가 종이에 스미기도 전에 빗방울 하나가 그 위에 떨어졌다. 글자가 맑은 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서한비—안 적혀요.
연이—거봐. 장부도 갚지 말래.
서한비는 젖은 장부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아주 작게 웃었다. 소리 없이, 어깨만 한 번 흔들리는 웃음이었다.
불이 조금 낮아졌다. 연이가 장작 대신 마른 카드 조각 하나를 넣었다. 불꽃이 잠깐 별 모양으로 튀었다.
연이—저기. 하나 물어봐도 돼?
서한비—장부 말고는 다 대답할게요.
연이—첫 번째 봄의 나는 너를 뭐라고 불렀어?
서한비의 손이 멈췄다. 우산 손잡이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연이—실 타고 올 때 들은 것 같아. 흐릿하게. 근데 단어가 기억이 안 나.
서한비—그건 말 안 할래요.
연이—왜. 나한테 한 말이잖아. 나 비슷한 사람이.
서한비—그 애한테 받은 거라서요. 연이 씨가 다시 부르면, 그 애가 진짜로 없어질 것 같아요.
연이가 입을 다물자 불이 작게 튀었다. 네오의 눈꺼풀이 그 소리에 조금 움직였다.
연이—그 애가 부럽다. 나보다 너를 먼저 알았잖아.
서한비—그 애는 연이 씨예요. 같은 손으로 우산을 기울였어요.
연이—같은 손이어도 다른 봄이야. 그 봄은 네 거야. 내가 뺏으면 안 되지.
연이—그럼 나는 새로 지을게. 내 거로.
서한비—뭘요?
연이—부를 이름. 서한비는 너무 길고, 서한비 씨는 너무 멀고. 호랑이 씨는 이제 틀렸고.
연이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글자를 써 보았다. 하나, 둘. 지웠다. 다시 썼다.
연이—한비. 한비야.
서한비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커졌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술만 움직였다. 불빛 속에서 젖은 속눈썹이 반짝였다.
서한비—그거, 성 빼면 끝이잖아요. 너무 쉬워요.
연이—쉬운 게 좋아. 비 올 때 빨리 부를 수 있게.
서한비—비 올 때만 부르려고요?
연이—맑은 날도. 너 맑은 날에 우산 들고 다니잖아.
서한비는 대답 대신 우산을 품에 꼭 안았다. 테이프 감긴 손잡이가 턱에 닿았다. 그 자세 그대로 한참 있었다. 그러다 아주 조그맣게 따라 했다.
서한비—한비. 네. 한비 할게요.
높은 창 밖으로 비가 조금 내렸다. 차갑지 않은 비였다. 성당 바닥의 먼지가 가라앉고 공기가 맑아졌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 쪽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연이의 손등이 조금 더 따뜻해 보였다. 서한비의 손은 아직 차가웠다.
연이—그럼 하나만 더. 이건 대답해 줘. 네오 왜 저래?
서한비—저래, 라뇨.
연이—발소리도 안 나고 손이 카드를 통과해. 사람으로 돌아왔는데 몸이 자꾸 사라지잖아. 너는 이유를 알지?
서한비가 네오를 보았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연이의 소매를 쥔 손이 조금 움직였다. 듣고 있었다.
서한비—그건 제 빚이 아니라서 제가 말할 수 없어요.
연이—빚 얘기 그만한다며.
서한비—그럼 약속이라고 할게요. 그분이랑 한 약속. 대신 하나만 알려 드릴게요.
서한비—내일 그 문패, 무슨 일이 있어도 읽지 마세요. 소리 내서는 더더욱.
연이가 내려다보자 네오가 손가락을 조금 굽혔다. 고맙다는 말 대신 그녀의 손을 약하게 쥐었다.
연이—알았어. 안 읽어. 대신 아침에 다 말해 줘야 돼, 네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숨이 조금 고르게 돌아왔다. 연이는 네오의 등을 받친 채 기둥에 기대 잠들었다.
새벽. 기둥 반대편에서 윤달이 하품을 했다. 손바닥의 장갑을 고쳐 끼고, 일행 쪽을 돌아보았다.
윤달—어.
모카는 아직 코를 골고 있었다. 서한비는 우산을 안은 채 앉아서 잠들어 있었다. 연이는 기둥에 기대 고개를 떨군 채였다.
어깨가 비어 있었다. 덮어 주었던 겉옷만 바닥에 남아 있었다. 먼지 위에는 발자국조차 없었다.
윤달—모두 일어나요. 고양이님이 없어요.
멀리서 문 하나가 삐걱 열리는 소리가 났다. 6번 문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