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은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둘, 셋, 열. 일식의 하늘 아래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서한비—이건 제가 하는 게 아닌데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윤달—아니요, 숙녀분이 하는 거예요. 손바닥 보세요.
서한비가 손을 내려다보았다. 빗방울이 손바닥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었다. 손바닥에서 솟아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고 있었다.
윤달—그거, 흑월이 준 물이 아니에요. 원래 숙녀분 물이에요. 사주로 치면 癸. 빗물.
서한비—제 물은 늘 사람을 빠뜨렸어요. 서고에서도, 그 애를.
윤달—고리가 그렇게 쓰게 시킨 거죠. 고리가 없어지니까 원래대로 내리는 거고요.
비가 라후의 벌린 입 안으로 쏟아졌다. 머리가 컥 하고 멈췄다. 삼키려던 별빛이 물에 젖어 무거워졌다.
흑월—무엇이냐, 이 미지근한 것은.
라후가 기침을 했다. 입에서 별빛이 한 움큼씩 흘러나왔다. 꺼졌던 바라니가 다시 희미하게 켜졌다.
연이—내 달! 돌아왔어!
연이의 메모장 위로 검은 연기가 내려앉았다. 연기가 빗물에 젖어 다시 글자가 되었다. 장보기. 과제 제출. 바다 가기. 조금 번졌지만 읽을 수 있었다.
연이—바다 가기, 살았다!
서한비—그거, 아직 날짜도 안 정했다면서요.
연이—그러니까 살려야지. 날짜 없는 약속이 제일 맛있다며. 그럼 날짜 박아서 맛없게 만들 거야.
라후가 몸 없는 머리를 흔들었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머리가 뒤로 밀려났다. 하늘의 검은 원이 조금씩 작아졌다.
그러나 비는 금세 가늘어졌다. 서한비의 손바닥에서 솟는 물줄기가 실처럼 얇아졌다. 라후가 다시 입을 벌렸다.
윤달—숙녀분 물이 모자라요. 한 방울로 시작한 비라서.
연이—(바라니. 품는 별. 품었다가 내보낸다고 했지.)
연이가 두 손을 모아 하늘로 내밀었다. 손바닥에 빗물이 고였다. 고인 물은 흘러내리지 않고 연이의 손 안에서 점점 불어났다.
연이—그릇이라며. 그럼 이렇게 쓸 거야. 받은 거 모았다가 다시 내보내는 데.
손 안의 물이 덩굴처럼 뻗어 올라갔다. 서한비의 가는 물줄기에 감겨 붙었다. 두 줄기가 하나로 꼬이자 비가 다시 굵어졌다.
서한비—제 비를, 받아서 돌려주는 거예요?
연이—반반. 원래 그런 거잖아.
흑월—고리도 없는 것이, 감히.
서한비—고리가 없으니까요. 이제 당신 셈은 저한테 안 통해요.
비는 스물일곱 달집 전체로 번졌다. 기와 위로, 우물 안으로, 돌바닥의 갈라진 틈으로. 차갑지 않았다. 여름 끝의 비처럼 미지근했다.
모카—이거, 비 맞으니까 수염이 안 쭈글거려. 이상한 비네.
윤달—좋은 비는 원래 그래요. 단비라고 하죠. 기다리던 데에만 내리는 비.
연이의 손목에서 무언가가 우두둑 소리를 냈다. 얼음 깨지는 소리였다. 손목의 글자판이 저절로 떠올랐다.
[ 年 壬 · 해빙 ]
맨 왼쪽 칸에 얼어 있던 壬이 녹고 있었다. 검게 굳었던 글자가 맑은 파란빛으로 돌아왔다. 연이의 손끝까지 따뜻한 것이 번졌다.
[ 年 壬午 · 月 丙午 · 日 乙亥 · 時 庚辰 ] 8/8
연이—따뜻해. 손목이 아니라, 속이.
윤달—이제 물이 흘러요. 庚이 壬을 낳고, 壬이 乙을 키워요. 관인상생. 금이 나무를 베는 게 아니라 물을 거쳐서 나무를 먹이는 거죠.
연이—번역 좀.
윤달—고양이님이 숙녀분을 다치게 하던 힘이, 이제 비를 거쳐서 숙녀분을 키운다는 뜻이에요. 궁합 아주 좋아졌어요.
네오—궁합 얘기는 나중에 해.
네오가 팔을 들어 보았다. 여전히 어깨까지 투명했다. 그런데 손을 움직일 때마다 짓던 찡그린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그는 조심히 손가락을 한 번 더 굽혔다.
연이—네오. 이제 안 아파?
네오—아픈 건 덜하다.
연이—아픈 건? 그럼 안 덜한 건 뭔데.
네오—젖은 옷이 달라붙는 거.
연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자 네오는 고개를 돌려 소매를 털었다. 물방울이 투명한 팔을 통과했다. 연이 쪽에서는 젖은 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비가 잦아들었다. 그때 서한비가 무릎을 꿇었다. 얼굴이 종이처럼 하얬다. 손바닥에서 솟던 물이 멈춰 있었다.
연이—야! 왜 그래!
서한비—남은 물을 다 썼나 봐요. 괜찮아요. 원래 한 방울이었잖아요.
모카—괜찮긴 뭐가 괜찮아! 얼굴이 두부야!
모카가 앞치마로 서한비의 머리를 닦았다. 거칠게, 그래도 꼼꼼하게. 서한비는 가만히 있었다. 누가 머리를 닦아 주는 게 아주 오랜만인 것처럼.
서한비—모카 씨, 손이 맵네요.
모카—요리사 손이 원래 매워. 고추 다듬다 와서.
서한비가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젖은 장부가 아니었다. 작게 접힌 쪽지 하나였다. 끝에 북채 모양의 매듭이 묶여 있었다.
서한비—제일 먼저 돌려줘야 할 거예요. 이것만은 장부에 안 적었어요. 못 적었어요.
연이가 쪽지를 받았다. 매듭을 풀었다. 서툰 글씨로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아이가 직접 쓴 글씨였다.
연이—도담.
이름을 소리 내어 읽는 순간, 아주 멀리서 북소리가 났다. 둥. 둥. 서툴고 신난 박자. 비겁의 섬 쪽 하늘이었다.
모카—들려. 북소리야. 박자 엉망인 거 보니까 그 꼬마 맞네.
연이—도담이. 맞아. 도담이였어. 왜 이걸 잊어버렸지.
서한비—제가 가져갔으니까요. 이름을 빼앗으면 남들도 그 아이를 잊어요. 그래서 박수가 끊긴 거고요.
연이—알아. 그날 그 애 북채 떨어뜨리는 거 내가 봤어. 너 그때 웃었잖아.
서한비—웃었어요. 장부가 한 줄 맞아서. 그 웃음도 제 거예요. 흑월 거 아니에요.
연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모카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서한비의 편을 들지 않았다. 서한비도 누가 편들어 주기를 바라는 얼굴이 아니었다.
서한비—그런데 이름만은 망토 안에 넣고 다녔어요. 지우려고 할 때마다 장부가 젖었거든요.
서한비가 이번에는 장부를 펼쳤다. 회수란의 한 줄, 도담의 박수. 빗물에 젖은 그 줄이 천천히 번졌다. 글자가 녹아 빗물과 함께 흘러내렸다.
서한비—움직여요. 아까는 꼼짝도 안 하더니.
윤달—비로 거둔 게 아니라서 비로는 못 푼다고 생각했는데요. 이름을 먼저 돌려주니까 장부가 길을 찾았나 봐요.
서한비—그럼 하나씩 해요. 비 올 때마다 한 줄씩. 시장 할머니, 지하 무대 아이들, 시간 섬 사람들.
모카—다 갚을 때까지 몇 번 비가 와야 돼?
서한비—많이요. 아주 많이.
모카—그럼 우산 장사 해도 되겠네.
연이가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 쪽지를 메모장 맨 앞 장에 끼웠다. 그리고 서한비를 똑바로 보았다.
연이—같이 가. 대신 시험이야.
서한비—시험이요?
연이—내가 계속 볼 거야. 네가 진짜 하나씩 돌려주는지. 다 돌려주면 그때 생각해 볼게. 용서.
서한비—보호관찰이네요.
연이—응. 장부식으로 하면 미수.
서한비—미수. 제 장부에서 제일 많이 쓴 말을 이제 제가 받네요.
네오—나도 볼 거야. 아직 눈은 좋거든.
윤달—저도요. 감시하려면 생년월일시가—
서한비—빚이라니까요.
모카—이 사람 궁합 병 좀 누가 고쳐!
웃음이 터졌다. 비 그친 우물가에 처음 듣는 소리처럼 울렸다. 서한비는 웃지 않았다. 대신 입술을 꾹 물었다. 우는 걸 참는 얼굴이었다.
일행에서 조금 떨어진 우물 뒤. 윤달이 장갑을 다시 끼며 네오 옆에 쭈그려 앉았다. 손바닥 구멍이 장갑 밖으로 비칠 만큼 커져 있었다.
윤달—네오 씨. 아까 팔에 물이 그냥 통과하던데요.
네오—봤나.
윤달—저만 봤어요. 숙녀분은 카드 줍느라 바빴고요.
네오—그럼 그 약속, 아직 유효하지.
윤달—그 애가 날 잊으면 네가 기억해라. 네. 유효해요. 저 원래 남한테 잊히는 쪽이라, 기억하는 쪽은 처음이지만요.
네오—너 혼자 맡기엔 무거운 일이야. 농담으로 넘기지 마.
윤달—그러니까 사기꾼한테 맡기시는 거죠. 진짜 점술가는 이런 계약 안 해요. 손해라서.
네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이 쪽을 오래 바라보았다. 연이는 서한비의 젖은 코트를 비틀어 짜 주며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하늘이 갈라졌다. 일식이 찢어지며 그 틈으로 커다란 종이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내렸다. 카드였다. 하나하나가 문짝만 했다.
라후의 머리가 카드 틈으로 빨려 들어갔다. 꼬리 케투도 뒤따랐다. 둘은 카드 그림 속으로 스며들어 그림자가 되었다.
흑월—스물두 장 너머에서 기다리마. 다음 하늘에서는 네 우산도, 네 비도 소용없다.
흑월—그리고 그 고양이. 이미 반쯤 내 것이다. 실을 한번 세어 보아라.
연이는 손목을 보았다. 네오에게 이어진 붉은 실. 두 가닥이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한 가닥이었다. 그 한 가닥마저 실밥이 일어나 있었다.
연이—네오. 실이.
네오—안다.
연이—안다고 끝내지 마. 이번엔 제대로 말해.
네오—다음 하늘에 가면 말할게. 약속해.
카드 한 장이 연이의 발치에 떨어졌다. 뒷면이 위였다. 별 무늬가 박힌 남색 뒷면. 연이가 뒤집으려 했지만 카드는 바닥에 붙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윤달—숙녀분 탄생 카드예요. 때가 되면 저절로 뒤집혀요.
연이—(그 때가 언젠데. 다들 나중이래. 나중이 너무 많아.)
마지막 빗방울이 떨어졌다. 젖은 돌바닥 위에 일행의 발자국이 찍혔다. 연이의 것, 서한비의 것, 모카의 것, 윤달의 것.
네오가 걸어온 곳에만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연이는 카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