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꿀 운세다채로운 운세, 나를 위한 이야기

EP.29 · 41 / 73

이번엔 내가 누른다

처음엔 강요된 YES였다. 이번에는 연이가 스스로 버튼을 누른다.

한글 약 3,588자 · 읽는 시간 약 9분

휴대폰 화면에는 버튼 하나가 떠 있었다. 이 앱을 처음 깔던 날처럼. 그날은 비가 왔고, 연이는 화가 나 있었고,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연이—이번엔 미끄러지면 안 돼. 약관부터 읽자.

연이는 침대에 앉아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글자가 끝없이 이어졌다. 시간을 파는 섬에서 배운 버릇이었다. 작은 글씨부터.

[ 다른 하늘 · 열두 개의 궁 · 입장 조건 · 본인의 생년월일시 ]

연이—(생년월일시. 사주 섬에 갈 때는 이런 것도 안 물어봤잖아. 그냥 빨려 들어갔지.)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이 하늘은 당신의 별자리로 지어져 있습니다. 당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당신이 가장 잘 압니다.

연이—내가 가장 잘 안다고? 나 내 별자리도 잘 모르는데.

네오는 펼쳐 둔 가방 옆에 앉아 있었다. 밤새 모은 짐이 그의 무릎에 쌓여 있었다.

「그건 안 가져가도 돼. 자리 없어.」 연이가 두꺼운 담요를 가리켰다. 네오는 잠깐 고민하다 담요를 반으로 접었다.

「밤에는 추울 수 있잖아. 반으로 접으면 들어가. 내가 들게.」

연이—고객센터가 무임승차를 하네. 그래, 같이 가.

연이는 가방에 하나씩 챙겨 넣었다. 테이프 감긴 우산. 메모장. 충전기. 그리고 편의점에서 사 온 단팥빵 두 개.

연이—(하나는 내 거. 하나는 그 사람 거. 이번엔 받을 때까지 들고 다닐 거야.)

지갑 안쪽의 부적이 다시 미지근해졌다. 연이가 꺼내 보았다. 종이 위의 초승달이 반쯤 차올라 있었다.

연이—윤달 씨 부적. 아직 따뜻해. 이거 쓰면 그 사람한테 가는 거지?

「한 번 쓸 수 있다고 했다. 길잡이 쪽으로.」

연이—그럼 길잡이부터 찾아야겠다. 혼자 헤매는 거 이제 질렸어.

연이는 생년월일시 칸을 눌렀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2002년 7월 6일. 오전 8시 30분. 서울.

연이—(엄마가 늘 그랬어. 아침 먹을 시간에 태어나서 먹을 복은 있다고.)

[ 乙亥 연이 · 명반 작성 중 · · · ]

화면 위에 열두 칸짜리 판이 그려졌다. 바둑판처럼 네모난 칸이 빙 둘러 있고, 가운데는 비어 있었다. 칸마다 작은 별 이름이 반짝였다.

연이—이게 뭐야. 사주랑 다르잖아. 여덟 글자가 아니라 열두 칸이야.

「다른 하늘이라 하지 않았나. 다른 하늘은 다른 글자로 읽는다.」

연이—공부할 게 또 늘었네. 나 이번 학기 학점 망하겠다.

그때 열두 칸 중 하나에 검은 점이 번졌다.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점은 칸의 테두리를 타고 천천히 퍼졌다.

연이—네오. 이거 봐. 칸 하나가 까매지고 있어.

네오가 짐을 내려놓고 화면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읽어 내려갈수록 눈빛이 굳었다.

「일식 냄새다. 저쪽 하늘에도 손을 뻗었군.」

연이—그 사람도 거기 있겠지. 끌려갔잖아. 휴대폰 속으로.

「아마.」 네오는 잠시 말을 골랐다. 「무서워? 나한테는 말해도 돼.」

연이—응. 엄청 무서워. 근데 무서운 거랑 안 가는 거는 다른 얘기야.

연이는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천장의 얼룩. 비가 새던 자리. 책상 위의 별 카드. 그 카드는 여전히 뒤집히지 않았다.

연이—(처음엔 억지로 끌려갔어. 우주한테 별점 하나 줬다고. 이번엔 아니야.)

연이는 별 카드를 집어 들었다. 손톱으로 모서리를 들어 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듯이.

연이—너도 데려갈게. 언젠가는 뒤집히겠지.

카드를 메모장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 메모장 첫 장에 큰 글씨로 적었다.

[ 모카 · 수달 · 랩 못함 / 윤달 · 오른손 장갑 · 궁합 사기 / 서한비 · 우산 · 미수 2 / 네오 · 고양이였음 · 지금은 사람 · 내 편 ]

「마지막 줄은 왜 적나.」

연이—모습이 또 달라져도 너인 건 기억해야지. 고양이였을 때부터 내 편이었으니까.

네오는 대답 대신 연이의 손등을 가만히 덮었다. 손가락 사이로 금빛이 잠깐 새어 나왔다.

연이—좋아. 이제 별점부터 남기자.

「…지금?」

연이—지금. 이번엔 미리 남길 거야. 이 앱, 처음엔 별 하나 줬잖아.

연이는 앱 리뷰 칸을 열었다. 손가락이 한참 망설이다가 움직였다.

[ ★★★☆☆ · 억지로 데려가는 건 최악. 근데 덕분에 친구가 생겼음. 나머지 별 둘은 다녀와서 줌 ]

「별 셋이라. 고객센터가 감동했다.」

연이—감동하지 마. 다녀와서 깎을 수도 있어.

연이는 운동화 끈을 고쳐 묶고 가방을 멨다. 네오가 우산을 받아 들었다. 둘은 나란히 문 앞에 섰다.

연이—준비됐어. 고객센터, 연결해 줘.

「나는 고객센터가 아니다.」

연이—알아. 근데 말은 그렇게 해야 무섭지가 않아.

화면에는 여전히 버튼 하나뿐이었다. 동그란 버튼. 그 위에 글자 두 개.

[ YES ]

처음 그날, 이 버튼은 연이의 손가락을 끌어당겼다. 오늘은 아무것도 끌어당기지 않았다. 그냥 거기 있었다. 누르든 말든 연이에게 맡긴 채.

연이—(아무도 억지로 누르게 안 해. 그러니까 진짜 내 선택이야.)

연이—서한비 씨. 우산 돌려받으러 갈게요.

연이는 엄지로 버튼을 꾹 눌렀다. 화면이 하얗게 부풀었다. 방바닥이 물처럼 출렁이고, 천장의 얼룩이 별자리처럼 빛났다.

몸이 위로 떨어졌다. 아래가 아니라 위로. 방이 점점 작아지더니 손톱만 한 네모가 되었다. 그 네모가 별 하나가 되었다.

연이—꿀악! 아니 잠깐, 이번엔 위로 떨어져?!

「버릇이 안 고쳐졌군. 꿀악은 돼지 때 소리 아니었나.」

연이—습관이야! 습관은 몸이 바뀌어도 남는다고!

경계를 넘자 네오의 손끝에 금빛이 돌았다. 연이는 저도 모르게 그 손을 꽉 잡았다. 몸은 바뀌지 않았다. 둘 다 사람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네오—손 놓아도 돼. 이번엔 그대로야.

연이—알아. 그냥 조금만 더 잡고 있을래.

네오—그럼 미끄러지지 않게 잘 잡아.

연이—응. 이번에는 안 놓칠게.

발이 땅에 닿았다. 돌바닥이었다. 차갑고 매끄러웠고, 그 아래로 별빛이 비쳐 올라왔다. 땅 밑에도 하늘이 있는 것처럼.

연이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앞발이 아니었다. 손가락 다섯 개. 손톱. 손목의 시계 자국까지.

연이—나 사람이야. 돼지가 아니야. 이번엔 사람으로 왔어.

네오—너는 이미 네 모습을 되찾았다. 저쪽 하늘에서 한 번 찾은 건 다른 하늘에서도 안 잃는다.

연이—다행이다. 사람 손이면 우산도 쓸 수 있어.

눈앞에 거대한 궁전이 서 있었다. 지붕이 몇 겹인지 셀 수 없었다. 처마 끝마다 별 하나씩 매달려 등불처럼 흔들렸다.

궁전을 둘러싼 담에는 문이 열두 개 있었다. 문마다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글자 대신 별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 命盤 판독 · 乙亥 연이 · 명궁 寅 · 주성 염정 ]

연이—(명궁. 염정.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네오—나도 몰라. 이 하늘은 처음이야.

연이—네오가 모르는 것도 있어?

네오—내가 다 아는 건 아니야. 아는 척을 좀 잘하지.

연이—그거 엄청 솔직한 고백이다.

연이는 지갑에서 부적을 꺼냈다. 초승달이 이제 거의 다 차 있었다. 종이가 손바닥 위에서 저절로 몸을 틀었다. 나침반 바늘처럼.

연이—이쪽이래. 윤달 씨가 있는 쪽.

부적이 가리킨 것은 열두 문 중 서쪽 문이었다. 현판에 말 모양 별과 길게 뻗은 길이 그려져 있었다.

네오—여행의 문인가. 그 사기꾼다운 자리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는.

문으로 가는 길은 회랑이었다. 기둥 사이로 작은 별 사람들이 오갔다. 몸이 반쯤 빛으로 된 사람들. 등에 짐을 지고, 손에 등불을 들고.

연이—(사람들이 다 별빛으로 되어 있어. 근데 표정은 우리랑 똑같네. 바쁘고, 피곤하고.)

그런데 몇몇 별 사람은 얼굴이 회색이었다. 빛이 빠져나간 것처럼. 그들은 등불을 들고 있었지만 등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연이—저 사람들은 왜 저래. 식상의 섬에서 봤던 회색 도장이랑 비슷해.

네오—먹힌 거다. 빛을.

회색 얼굴 하나가 연이 옆을 지나가다 멈췄다. 별 사람이 연이를 보았다. 아니, 연이 너머의 무언가를 보았다.

「…관(官)의 문이 닫혔어요. 검은 것이 거기서 나와요. 가지 마세요.」

연이—관의 문이요? 그게 어딘데요?

별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빛 없는 등불을 든 채 회랑 저편으로 사라졌다.

연이—(가지 말라는 말. 요즘 왜 다들 나한테 어디 가지 말라고 하지.)

네오—오지 말라고 저렇게 막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가서 확인하자.

연이—응. 그게 문제야.

회랑 기둥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젖어 있었다. 맑은 하늘인데도 물이 뚝뚝 떨어졌다.

연이는 종이를 떼어 냈다. 가늘고 단정한 글씨. 장부에 적듯 한 획씩 꾹꾹 누른.

[ 장부 · 乙亥 연이 · 미수 2 ]

연이—그 사람 거야. 서한비 씨가 여기 지나갔어.

네오—물 냄새가 아직 진하다. 오래되지 않았다.

연이는 젖은 장부 한 장을 조심스럽게 접어 메모장 사이에 끼웠다. 별 카드 옆에.

연이—미수는 내가 받을 거야. 대신 갚으러 다니는 거 그만하게.

회랑 끝에서 바람이 바뀌었다. 별 냄새 대신 젖은 재 냄새가 났다. 하늘 한쪽이 먹물을 쏟은 것처럼 까맸다.

연이—저기. 저쪽 하늘이 썩은 것 같아.

네오—물러서. 저건 보통 어둠이 아니다.

검은 하늘에서 실 같은 것이 흘러내렸다. 실은 바닥에 닿자 손가락 모양으로 갈라졌다. 손가락들이 돌바닥을 긁으며 이쪽으로 기어 왔다.

흑월—스스로 들어왔구나, 그릇아. 이번엔 누가 등을 떠밀지도 않았는데.

연이—그래. 내 발로 왔어. 그러니까 이번엔 내 발로 나갈 거야.

흑월—나갈 수 있을지는 이 하늘이 정한다. 너의 열두 칸 중 하나는 이미 나의 것이다.

네오가 앞으로 나섰다. 손끝에서 뻗은 금빛 날이 검은 손가락 셋을 끊었다. 잘린 자리에서는 불똥 대신 검은 김이 피어올랐다.

네오—…이 손, 금을 먹는다.

연이—네오, 손! 손끝이 까매졌어!

오른손 끝이 먹물에 담근 듯 검게 물들어 있었다. 네오는 손을 털었다. 얼룩은 떨어지지 않았다.

네오—조금 따끔해. 아직은 움직일 수 있어.

연이—그 말 하지 마. 그 말 할 때마다 안 괜찮았잖아.

상관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소리치고 싶었다. 저 검은 하늘에 대고 다 쏟아붓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네오가 다쳤다는 걸, 연이는 기억했다.

연이—(참자. 지금 소리치면 네오가 또 다쳐. 소리 말고, 다른 걸로.)

연이는 소리치는 대신 부적을 높이 들었다. 초승달이 끝까지 차올랐다. 종이가 은빛으로 타올랐다.

은빛이 회랑을 쓸었다. 검은 손가락들이 움찔하며 물러났다. 부적은 재가 되어 연이의 손바닥에서 흩어졌다.

흑월—사람 점술가의 부적이라. 공망이 남의 손까지 빌리는구나. 오래는 못 막는다.

검은 하늘이 천천히 닫혔다. 바닥의 손가락들도 실처럼 풀려 사라졌다. 젖은 재 냄새만 남았다.

정적이 돌아왔다. 연이는 그제야 자기가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휴, 하고 길게 내쉬었다.

연이—부적 다 썼어. 윤달 씨한테 가는 길도 같이 탔나 봐.

네오—아니다. 저기를 봐라.

재가 흩어진 자리에서 은빛 가루가 한 줄로 이어져 있었다. 서쪽 문까지. 꼭 누가 빵 부스러기를 흘려 둔 것처럼.

연이—역시 사기꾼은 아니었네. 길까지 깔아 주고.

네오—사기꾼이다. 실력 좋은 사기꾼.

연이—질투는 여전하고.

네오—질투가 아니다. 객관적 평가다.

연이는 네오의 오른손을 보았다. 검은 얼룩이 손목 쪽으로 조금 올라와 있었다. 네오는 그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연이—감추지 마. 이번엔 숨기기 없기로 했잖아.

네오—…번지면 말하겠다. 약속하지.

연이—번지기 전에 말해. 그게 약속이야.

네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이는 그 약속도 메모장에 남기고 싶었다.

서쪽 문 너머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궁합 봐 드려요. 생년월일시만 주시면 운명의 짝 바로 찾아 드립니다. 오늘만 반값.」

연이—…저 목소리.

네오—반값이라니. 원래도 사기였는데.

연이는 웃음을 참으며 서쪽 문으로 달렸다. 은빛 가루가 발밑에서 반짝였다. 그 뒤로, 하늘 한쪽 관(官)이라 적힌 문 위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까악,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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