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꿀 운세다채로운 운세, 나를 위한 이야기

EP.25 · 31 / 73

흑월

일식의 본체 흑월이 입을 연다. 그릇. 호랑이에게 연이의 남은 운을 거두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한글 약 2,770자 · 읽는 시간 약 7분

해가 사라진 하늘 아래, 강물이 검은 거울처럼 굳어 있었다. 바람도 멎었다. 물안개마저 공중에 멈춘 채 떨지 않았다.

연이—간다. 어디로 가면 돼. 저 위야? 강 속이야?

모카—너 미쳤어? 오라고 하면 가냐? 저건 딱 봐도 덫이잖아!

연이—덫인 거 알아. 그래도 영냥이가 저기 있잖아.

윤달—숙녀분. 저쪽이 원하는 건 고양이님이 아니에요. 숙녀분이에요. 고양이님은 미끼고요.

연이—그럼 미끼를 물어야지. 안 물면 미끼는 어떻게 되는데.

윤달은 대답하지 못했다. 모카도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검은 원 둘레의 붉은 고리가 한 번 크게 타올랐다. 굳어 있던 강물 한가운데가 둥글게 꺼지더니, 그 아래로 계단 같은 그림자가 생겼다.

목소리—영리한 돼지구나. 계단을 깔아 주마. 친구들도 데려와도 좋다. 구경꾼이 있어야 재미있지.

연이—너 누구야. 이름이 뭐야.

목소리—이름이라. 너희는 늘 이름부터 묻는구나. 좋다. 오늘은 공짜로 하나 주지.

[ 黑月 · 흑월 · 빛을 먹는 달 ]

글자가 하늘에 새겨지듯 떠올랐다가, 가장자리부터 검게 타들어 갔다. 마치 이름조차 먹어 치우는 것처럼.

윤달—흑월.

윤달의 손바닥 구멍이 거칠게 소용돌이쳤다. 윤달은 장갑을 다시 끼려다가, 손이 떨려 끼지 못했다.

모카—사기꾼, 너 알아?

윤달—몰라요. 그런데 이 구멍은 알아요. 처음 생긴 날부터, 이 구멍은 저 이름 쪽으로만 당겨졌어요.

세 사람은 강물 아래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벽에는 검은 손바닥 자국이 빽빽하게 찍혀 있었다. 모두 안쪽을 향해 있었다.

모카—이 손자국들, 다 밖으로 나가려고 긁은 거야? 아니면 안으로 끌려간 거야?

윤달—둘 다요. 끌려간 다음에 나가려고 긁은 거예요.

연이—그럼 나가는 길도 있다는 거네.

모카—돼지 너는 이 상황에 왜 그렇게 긍정적이야.

연이—부정적이면 계단이 짧아져?

윤달—숙녀분 말이 맞아요. 계단은 긍정해도 부정해도 길이가 같아요. 제가 장담해요.

모카—둘 다 똑같아. 이 와중에.

모카가 웃음 같은 콧김을 뿜었다. 계단 끝에서 붉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계단 끝은 다시 하늘이었다. 강물 밑에 거꾸로 걸린 하늘. 그 한가운데에 검은 원이 떠 있었고, 원 아래에 검은 실로 엮은 고치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고치 사이로 하얀 털이 비쳤다. 고치가 천천히 숨을 쉬듯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연이—영냥아!

영냥이—오지 마. 연이야, 돌아가.

연이—살아 있네. 살아 있어. 말도 하네.

영냥이—내 말을 들어라. 이건 나를 잡으려는 게 아니다. 너를 잡으려는 거다.

연이—알아. 다 알고 왔어.

고치를 감은 검은 실이 바짝 조여들었다. 영냥이가 이를 악물었다. 실이 지나간 자리의 녹이 검게 번졌다.

흑월—반갑구나, 꼬마 돼지.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지. 나는 너를 오래 봐 왔지만.

연이—얼굴 같은 거 없잖아. 그냥 구멍이잖아.

흑월—하하. 맞다. 얼굴은 빌려 쓰는 거다. 필요할 때, 필요한 사람 것을.

검은 원 표면이 물결쳤다. 잠깐, 그 위에 연이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가 지워졌다. 연이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윤달—숙녀분, 저 말 듣지 마요. 눈을 마주치지도 마요.

흑월—점쟁이. 네 손바닥은 아직 배가 고프냐. 내가 먹다 남긴 시간이 그 안에서 울고 있구나.

윤달—크윽.

윤달이 무릎을 꿇었다. 손바닥의 구멍이 저절로 벌어지며 그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모카가 윤달의 옷깃을 물고 버텼다.

모카—사기꾼, 버텨! 너 빨려 들어가면 궁합은 누가 봐 줘!

연이—그만해! 원하는 게 나라며. 나한테 말해. 다른 사람 건드리지 말고.

흑월—좋은 태도다. 장사가 되겠구나.

검은 원이 연이 쪽으로 기울었다. 거대한 눈동자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흑월—거래를 하자. 고양이를 돌려주마. 대신, 네 남은 운을 전부 다오.

연이—운?

흑월—네가 태어날 때 받은 것. 아직 쓰지 않은 내일들. 좋은 날, 운 좋은 날, 우연히 잘 풀리는 날. 그걸 전부.

윤달—숙녀분, 안 돼요. 운을 다 비우면 사람은 그릇이 돼요. 빈 그릇은 뭐든 담겨요. 저게 원하는 게 그거예요.

흑월—점쟁이가 말이 많구나. 그래, 그릇이다. 숨기지 않으마. 이 아이의 乙목 덩굴은 남의 숨까지 받아 품는다. 그런 그릇은 흔하지 않지.

영냥이—연이야, 듣지 마. 저건 너를 먹으려는 거야!

흑월—먹는 게 아니다. 채우는 거다. 이 아이가 품은 것들을, 이 아이 대신 내가 쓰겠다는 거지.

연이는 고치를 올려다보았다. 실 사이로 녹슨 앞발이 보였다. 어깨까지 번졌던 녹이, 이제 목덜미까지 올라와 있었다.

연이—(운은 또 모으면 돼. 꼬치도 다시 굽고, 노래도 다시 부르면 돼. 영냥이는 하나야.)

연이—할게.

모카—돼지!

윤달—숙녀분!

영냥이—연이야, 안 돼!

연이—영냥아. 너는 맨날 나 대신 아팠잖아. 이번에 한 번만, 내가 할게.

영냥이—그건 내가 정한 일이야. 네가 대신 정하지 마!

연이—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소용없는지 아닌지는 내가 정해.

영냥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제 연이가 했던 말이 그대로 돌아왔다. 그때는 듣고도 모른 척했던 말이었다.

흑월—계약 성립이다. 그럼 수금원을 부르지.

검은 원 아래 그림자가 쩍 갈라졌다. 그 틈에서 검은 호랑이가 걸어 나왔다. 망토 끝이 젖어 있었다. 오른 앞발의 금장 고리가 붉은 빛에 번들거렸다.

검은 호랑이—부르셨습니까.

흑월—장부를 펴라. 이 아이의 남은 운, 전부 거두어라.

호랑이의 시선이 연이에게 닿았다. 아주 잠깐, 시선이 멈추었다. 그리고 장부가 펼쳐졌다.

검은 호랑이—전부, 말입니까.

흑월—전부.

검은 호랑이—알겠습니다.

연이—또 너구나. 이번엔 박수 대신 뭘 가져가는데.

검은 호랑이—내일을요. 아프지는 않을 거예요. 그냥, 좀 추워질 거예요.

모카—줄무늬! 너 진짜 이거 할 거야? 돼지가 너한테 뭘 했는데!

검은 호랑이—수달은 빠지세요. 계약은 이미 끝났어요.

호랑이가 장부를 쥔 발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오른 앞발의 고리가 저절로 한 칸 조여들었다. 호랑이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다만 장부 모서리가 조금 구겨졌다.

장부의 연이 칸에서 빛이 빨려 나오기 시작했다. 분홍빛, 금빛, 연둣빛. 작은 별 같은 것들이 연이의 몸에서 하나씩 떨어져 나가 장부 속으로 들어갔다.

축제 섬에서 처음 맛본 꼬치. 정오 무대의 박수. 루나가 나눠 준 빵 반쪽. 하나가 빠져나갈 때마다 연이의 눈이 한 번씩 깜빡였다.

[ 장부 · 乙亥 연이 · 남은 운 회수 중 ]

연이—춥다.

영냥이—연이야.

고치를 감은 실이 끊어질 듯 팽팽해졌다. 영냥이가 몸부림쳤다. 그럴수록 실은 더 깊이 박혔다.

윤달—수달 씨, 저 장부. 제 손으로 빨아들일 수 있을지도 몰라요.

모카—그럼 해! 빨리!

윤달이 장갑을 벗어 던지고 손바닥을 장부 쪽으로 뻗었다. 구멍이 소용돌이치며 빛 몇 개를 낚아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구멍 가장자리가 찢어지듯 벌어졌다.

윤달—아악!

흑월—점쟁이야. 남의 그릇을 탐하면 네 구멍이 먼저 터진다.

윤달이 손목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구멍은 손바닥을 넘어 손목까지 번져 있었다. 모카가 그를 끌어안듯 막아섰다.

모카—그럼 내가 태워 버린다!

모카가 불씨를 던졌다. 불씨는 장부에 닿기도 전에 검은 원의 그늘에 빨려 들어가 꺼졌다. 모카의 꼬리털이 바짝 섰다.

모카—안 돼. 여기선 불이 안 붙어.

마지막 빛 하나가 연이의 앞발 끝에서 떨어져 나갔다. 아주 작은, 하얀 빛이었다. 연이는 그게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연이—다 됐어?

목소리에 높낮이가 없었다. 분홍빛이던 털이 잿빛으로 바래 있었다. 눈동자는 열려 있었지만,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다.

[ 장부 · 乙亥 연이 · 잔고 없음 ]

호랑이가 장부를 덮었다. 덮는 발이 아주 잠깐 떨렸다. 호랑이는 연이의 텅 빈 눈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검은 호랑이—수금 완료했습니다.

흑월—수고했다, 호랑이야. 이제 약속을 지켜야지.

검은 실이 풀렸다. 고치가 갈라지며 하얀 고양이가 연이 앞으로 떨어졌다. 영냥이는 땅에 닿자마자 몸을 일으켜 연이에게 기어갔다.

영냥이—연이야. 나야. 날 봐.

연이—응. 영냥이.

영냥이—왜 이랬지. 왜.

영냥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연이 앞에서 한 번도 내지 않았던 목소리였다.

연이—몰라. 그냥 그러고 싶었어.

연이는 웃으려 했다.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웃는 법이, 운과 함께 장부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았다.

영냥이가 연이를 앞발로 감쌌다. 녹슨 쪽이 아닌 오른 앞발로. 연이의 몸은 이상할 만큼 가벼웠다.

그때 영냥이의 목덜미에서 검은 실 한 가닥이 다시 솟았다. 실은 풀린 적이 없었다. 땅 밑까지 이어져, 검은 원과 연결되어 있었다.

흑월—돌려준다고 했지. 놓아준다고는 하지 않았다.

영냥이—이 비겁한.

흑월—셈이 정확한 거다. 내 수금원한테 배워라.

검은 원이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둘레의 붉은 고리가 거대한 입술처럼 벌어졌다. 그 안에서 검은 손들이 실타래처럼 풀려 나왔다.

흑월—그릇이 비었구나. 아름답다. 이제 담을 차례다.

호랑이가 한 걸음 물러섰다.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에 무언가가 스쳤다. 그 뒤로 검은 손들이 빈 연이를 향해 일제히 손가락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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