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항구에 닿기도 전에 소리가 먼저 건너왔다. 째깍, 째깍. 섬 전체가 커다란 시계 안에 들어앉은 것 같았다.
연이—저 소리 뭐야? 섬이 통째로 째깍거려.
모카—배 멀미 나는데 시계 소리까지. 이 섬 별 하나.
영냥이—내리기 전에 한 가지만. 여긴 재성의 섬이야. 무엇을 벌고, 쓰고, 남길 건지 계속 묻게 될 거야.
연이—재성이면 돈이잖아. 돈 섬이면 나 좀 설레는데.
부두에 발을 딛는 순간, 연이의 앞발 목에서 작은 종소리가 났다. 분홍 털 위로 동그란 시계 문양이 떠올랐다.
[ 재성의 섬 · 화폐: 시간 ] 보유 시간 72:00:00
연이—내 손목에 시계가 생겼어! 아니 앞발! 아무튼 생겼어!
영냥이—이 섬에서는 시간으로 값을 치른다. 쓰면 그만큼 네 하루가 줄어든다.
모카—잠깐. 그럼 요리하는 데 쓴 시간은? 그것도 깎여?
영냥이—남이 사 주면 늘어나겠지.
모카—그럼 이 섬에서 내가 제일 부자 되겠네.
시장은 북적였다. 상인들은 값을 부를 때 동전 대신 손목을 내밀었다. 손목끼리 맞대면 째깍 소리와 함께 거래가 끝났다.
하늘에는 토끼 귀가 달린 파란 비행선이 떠 있었다. 비행선 배에서 종이가 눈처럼 흩날렸다. 시간이 모자라세요? 청토끼 금융이 빌려드립니다.
연이—비행선이 웃고 있어. 저거 광고지야? 시간을 빌려준대.
영냥이—빌린 시간엔 이자가 붙어. 함부로 줍지 마.
좌판마다 작은 팻말이 꽂혀 있었다. 빵 한 개 3분. 사과 한 알 5분. 길 묻기 30초.
연이—길 묻는 것도 돈 받아? 아니 시간 받아?
모카—대신 웃는 건 공짜인가 봐. 저기 봐, 아무도 안 웃잖아. 공짜면 안 하는 거야.
모카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빈 좌판 하나를 차지했다. 남은 꼬치 재료를 꺼내 불을 붙이고 국자로 냄비를 두드렸다.
모카—식상의 섬 정통 꼬치! 한 개 2분! 맛없으면 3분 돌려드림!
첫 손님이 반신반의하며 손목을 내밀었다. 째깍. 꼬치를 문 손님의 눈이 동그래졌고, 곧 두 번째 손목이 내밀어졌다.
모카—봤지? 일한 만큼 늘어. 이 섬 별 둘로 올려 줄게.
영냥이—그게 정재다. 제 손으로 번 만큼 쌓이는 것. 느리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연이—그럼 나도 벌 수 있겠네. 나 리뷰 쓰는 건 자신 있어.
모카—리뷰로 누가 시간을 줘. 줄 서는 거나 도와.
이상한 것은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목소리는 젊은데 머리가 하얗게 센 사람이 많았다. 윤곽이 물에 번진 것처럼 흐린 사람도 있었다.
연이—영냥아. 저 사람… 얼굴이 흐려.
영냥이—시간을 너무 많이 판 거다. 하루를 팔면 하루만큼 옅어진다.
그때 시장 한가운데서 바구니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도둑이야! 누군가 외쳤다. 군중이 파도처럼 갈라지고, 그 한가운데 하얀 아기 토끼가 빵 바구니를 끌어안고 서 있었다.
루나—아니야! 훔친 거 아니야! 배달이야! 우리 언니가 구운 빵이란 말이야!
덩치 큰 상인이 손목을 들이밀었다. 빵 여섯 개, 18분. 거래 기록이 없다는 것이었다.
군중이 아이를 둥글게 에워쌌다. 저 집 요새 망했다던데. 망한 집 애가 훔치는 건 순서지. 수군거림이 원을 좁혔다.
연이—잠깐만요! 애가 배달이라잖아요! 기록이 없다고 도둑이 되는 건 아니죠!
시선이 이번엔 꽃돼지에게 쏠렸다. 말하는 돼지는 이 섬에서도 흔한 구경거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영냥이—저울을 빌려주시죠. 빵 여섯 개, 무게를 달아 보겠습니다.
영냥이는 빵을 저울 한쪽에 올리고, 바구니 밑에 끼어 있던 주문서를 다른 쪽에 올렸다. 저울이 정확히 가운데서 멈췄다.
영냥이—주문서의 무게와 빵의 무게가 같습니다. 훔친 물건에 주문서를 넣어 다니는 도둑은 제 기록에 없습니다.
군중이 웅성거리다 흩어졌다. 이 섬에서 저울로 증명된 것에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연이—방금 그거 진짜 멋있었어. 별 다섯 개.
영냥이—본 대로 말한 거야. 별점은 됐어.
루나—고마워! 진짜 고마워! 나 루나야. 언니랑 저기 언덕 빵집에 살아!
모카—빵집? 빵 한 개 3분이면, 원가는 몇 초야?
루나—원가는 몰라. 근데 언니는 요새 잠을 안 자. 밤새 반죽하고, 아침마다 얼굴이 조금씩 흐려져.
연이와 영냥이의 눈이 마주쳤다. 방금 시장에서 본 흐린 얼굴들이 떠올랐다.
연이—루나야. 언니 혹시, 시간을 팔고 있어?
루나—몰라. 언니는 괜찮대. 괜찮다는 말을 하루에 열 번 해.
빵집으로 가는 골목 입구에 보랏빛 천막 하나가 서 있었다. 천막 위에는 손글씨 팻말이 걸려 있었다. 궁합 상담. 숙녀분은 무료.
윤달—거기 분홍빛 숙녀분. 실례지만 생년월일시부터 알려 주시겠어요?
연이—저요? 저 돼지인데요?
윤달—돼지든 고양이든 태어난 시는 있죠. 궁합은 공짜로 봐 드릴게요.
천막 안의 남자는 스물예닐곱쯤 되어 보였다. 긴 머리를 대충 묶었고, 오른손에만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영냥이—떨어져라.
윤달—아이고, 보호자분이 계셨네. 고양이분도 봐 드릴까요? 남자분은 유료입니다만.
연이—영냥이 지금 질투해? 귀가 뒤로 젖혀졌어.
영냥이—경계다. 수상한 인간이니까.
모카—수상한 건 맞아. 사람인데 이 섬에서 안 흐려. 저 사람만 선명해.
모카의 말대로였다. 시장 사람들은 다들 윤곽이 번져 있었는데, 남자만은 먹으로 그린 듯 또렷했다.
윤달—관찰력 좋은 수달님이네요. 나중에 수달님도 봐 드릴게요.
모카—수달한테 궁합 보지 마.
윤달—제 이름은 윤달이에요. 이 섬에선 점쟁이, 다른 데선 길잡이. 그래서 숙녀분은요?
윤달—아, 그 전에 고양이분은 언제 태어나셨어요? 유료지만 첫 손님 할인 해 드릴게요.
영냥이—모른다.
윤달—자기 생일을 모르는 고양이라. 이 섬에서 제일 수상한 건 제가 아니었네요.
연이—(그러고 보니 나도 영냥이 생일 몰라.)
연이—음… 이천이 년 칠월 육일. 아침 여덟 시 반쯤이라고 들었어요.
윤달은 장갑 낀 손으로 붓을 쥐고 종이에 여덟 칸을 그렸다. 칸 몇 개를 채우다가 붓이 멈췄다.
윤달—여름 한낮에 태어난 덩굴이네요. 乙亥 일주, 丙午 월주. 그런데.
윤달—시주가 비었어요. 태어난 시가 적혀야 할 칸이 통째로.
[ 年 □□ · 月 丙午 · 日 乙亥 · 時 □□ ] 4/8
연이—그걸 어떻게 알아요? 이건 우리만 보는 건데.
윤달—저도 같은 앱을 받았거든요. 삼 년 전에.
천막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영냥이의 꼬리가 바닥을 한 번 쳤다.
영냥이—같은 앱이라면, 너도 운명을 고치러 온 사람이란 말이냐.
윤달—고치러 왔다가 눌러앉은 사람이죠. 선배 사용자라고 불러 주세요.
윤달—충고 하나 공짜로 드릴게요. 이 섬에선 시주가 빈 사람이 제일 비싸게 팔려요. 시간을 담을 칸이 비어 있으니까.
연이—팔린다니, 누가 날 사요?
윤달—사는 쪽은 언제나 있어요. 문제는 누가 먼저 값을 매기느냐죠.
윤달은 종이를 접어 연이에게 건넸다. 시주 칸 옆에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저랑 같네요.
연이—(같다는 게 무슨 뜻이지.)
연이—궁합 부스 리뷰. 무료인데 기분이 묘하게 비쌈. 별 세 개.
윤달—별 세 개면 이 천막 역대 최고점이에요. 보통은 하나거든요.
언덕 꼭대기 빵집은 작고 낡았다. 창밖으로 구름 위 도시가 내려다보였다. 문을 열자 갓 구운 빵 냄새가 쏟아졌다. 모카가 코를 벌름거렸다.
모카—이 냄새는… 진짜다. 이 섬에서 처음 맡는 진짜 냄새.
루나 언니—루나 데려다주셨군요. 고마워요. 빵 하나씩 드세요. 값은 안 받을게요.
연이—공짜요? 이 섬에서요?
루나 언니—빵값을 시간으로 받으면, 빵 맛이 시계 맛이 나거든요.
루나 언니의 얼굴은 반쯤 흐려져 있었다. 밀가루 묻은 손끝만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했다.
모카—반죽 결이 좋아. 손이 정직해. 근데 언니, 잠은 언제 자?
루나 언니—주문이 밀려서요. 내일 아침 것까지 해 둬야 해요.
루나—언니 거짓말. 어제도 안 잤잖아.
연이—언니, 공짜 빵은 못 받겠어요. 대신 일할게요. 저 반죽 접는 거 잘해요.
루나 언니—돼지 앞발로요?
연이—돼지 앞발이 원래 반죽 체질이에요. 말랑하잖아요.
루나 언니—그럼… 한 시간에 12분 드릴게요. 내일 아침부터.
루나 언니가 연이의 앞발에 제 손목을 살짝 대었다. 째깍. 숫자 옆에 작은 글씨가 생겼다. 예약된 급여 12분.
연이—내 생애 첫 월급… 아니 시급이다.
계산대 아래로 서류 한 장이 삐져나와 있었다. 파란 토끼 도장이 찍힌 계약서였다. 연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연이—(청토끼 금융… 시간 대출 계약서?)
그 순간 연이의 앞발에서 째깍 소리가 빨라졌다. 손목 시계 문양의 숫자가 저절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보유 시간 71:59:58 … 71:58:40 … 71:55:02 ]
연이—영냥아! 내 시간이 줄어들어! 나 아무것도 안 샀는데!
영냥이—누가 거둬 가고 있어. 저 실 끝을 봐.
연이의 앞발에서 가늘고 검은 실 한 가닥이 창밖으로 뻗어 있었다. 실은 언덕 아래, 섬 한가운데 우뚝 선 시계탑 쪽으로 사라졌다.
연이—시계탑 꼭대기에 뭔가 있어.
시계탑 꼭대기, 시곗바늘 위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망토 자락이 바람에 날렸다.
연이—저 망토… 호랑이야.
영냥이가 연이 앞으로 나섰다. 검은 실은 팽팽하게 당겨졌고, 숫자는 멈추지 않았다.
그때 빵집 문이 열렸다. 보랏빛 천막의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오른손 장갑을 이로 물어 벗기면서.
윤달—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숙녀분, 그 실 끊기 전에 한 가지만 약속해 줘요. 지금 보는 거, 내일 잊어도 서운해하지 않기로.